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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의 플래시백] <6>"술을 피할수록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술은 솔직해지기 위한 수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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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의 플래시백] <6>"술을 피할수록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술은 솔직해지기 위한 수단이니까"

입력
2011.10.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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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술 얘기 좀 해볼까?

술이 건강을 해친다고 생각하면 안 돼. 술을 피하고 의심하면 건강이 더 나빠져. 정말이야. 적어도 나는 그래. 술 마시면 피가 빨리, 힘차게 도는 게 느껴져. 건강검진 받아 보면 아직 쌩쌩하대. 혈관에 찌꺼기도 없고. 증명된 거잖아 그러면. 의사들이 들으면 펄쩍 뛸 소리겠구먼. 여튼 난 1년 365일 중에 400일은 마시는 거 같애. 낮술까지 하루치로 셈하면 말야. 허허.

지난 주 일본 오사카에 다녀왔어. KBS '한국인의 밥상' 녹화하러. 재일동포의 음식 생활사에 관한 내용이야. 방송 나올 때 한번 봐. 외국 땅에서 오래 살아 음식도 변형됐을 것 같은데, 오히려 거기 음식이 우리 음식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더라고. 어릴 때 맛봤던 그 김치맛, 국물맛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마음이 얼마나 짠하던지.

촬영 끝나고 소주 한잔 했지. 안주로 한인 시장에서 파는 돼지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어. 부속고기라고 그러나? 삶아서 뭉툭뭉툭 잘라서 주는 거 있잖아. 옛날 우리 오일장 같은 데서 팔던 거. 난 안주를 탐하는 편은 아냐. 근데 그걸 씹는데 머릿속에 아련하게 떠오르더라고. 울컥하고 말야. 시큼한 탁배기(탁배기) 한잔에 청춘의 희로애락이 한껏 고조되던 시절이.

난 사람들 술값으로 컸어.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주점 하셨잖아. 1955년 봄이었지. 명동에 어머니가 '은성'이라는 술집을 차리신 게 나는 부끄럽지 않았어. 물론 술장사라 그러면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지. 하지만 난 되레 자랑스러웠어. 그때 은성은 명동의 배고프고 술고픈 예술인들에게 아지트 같은 곳이었거든. 배우로서 내가 커가는 데 적잖은 자양분을 어머니 주점에서 얻은 거야.

물론 가게는 볼품 없었지. 근데 손님들의 면면은, 지금 기준에서 보자면, 엄청나게 화려했어. 작고한 영화인(아버지 최철)의 가족이 한다는 소문에 처음엔 영화판 사람들이 하나 둘씩 찾아오더군. 나중엔 문학, 음악, 미술, 연극하는 사람들까지 제집 사랑방처럼 드나들었지. 스산했던 1950ㆍ60년대, 촉 낮은 램프 아래 예술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니힐리즘 그 자체였어. 그 분위기를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내 능력 밖의 일이구만.

터줏대감은 '명동백작'으로 불렸던 이봉구 선생이셨지. 그분이 6ㆍ25전쟁 이후에 낸 소설은 대부분 은성에서 소주잔을 앞에 두고 쓴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돼. 박인환 천상병 기수영 박봉우 박계주 김관식 조흔파 선생 같은 문인들, 손응성 이종우 김환기 정규 선생 등 화가들, 시인이기도 한 변영로 홍승면 심연섭 이진섭 김중배 정영일 선생 같은 언론인들, 윤용하 임만섭 김동진 등 음악하는 선생들, 모두 다 은성의 단골들이셨어.

나? 그 어른들하고 대작하기엔 너무 어렸지. 어려워서 자주 갈 생각도 안 했어. 어쩌다 뵈면 그저 인사만 드렸지. 연극 공부하는 최영한입니다, 하고. 딱 한번 변영로 선생님이 술을 주신 적이 있어. "영한아, 한잔 받거라" 하시는데 거절할 수 있나. 다 비우고는 평소 버릇대로 탁탁 잔을 털었지. 근데 갑자기 눈앞이 번쩍 하는 거야. 선생님이 목덜미를 후려친 다음 호통을 치시더군. "이놈아, 아까운 술을 왜 버려!"

그래서, 내가 요즘 젊은 사람들하고 마실 때 술을 절대로 남기지 못하게 하나 봐. 허허, 농담이야. 술은 주량껏 마셔야지. (매니저에게) 안 그래? (…) 대답을 안 하는구먼.

난 젊은이들하고 술자리 하는 걸 즐겨. 편하게 대하라고 말해도 어려워하거든. 근데 한잔씩 하고 나면 주저 않고 깊숙한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잖아. 난 술의 의미가 그런 거라고 봐. 사람이 나이 들수록 자꾸 위선과 가식의 틀 속에 갇히잖아. 좀 떠들고 싶어도 못 떠들고, 누굴 욕하고 싶어도 못하고. 근데 술 마시면 그게 스스로 허락이 되잖아. 솔직해질 수 있고. 누가 술에 대해 물어보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그렇게도 얘기해. 술을 억제하는 게 더 나쁘단 건 그런 의미야. 솔직해질 기회를 스스로 닫아버리는 거지.

얼마 전에 방송 일로 목포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친구(매니저)랑 코디랑 셋이서 한잔 했어. 기차 출발할 때까지 딱 1시간 30분 동안. 근데 목포도 예전 같지 않더군. 도시화가 돼 버려서 말이야. 비 오는데 우산 쓰고 한잔 할 만한 데를 찾아서 헤맸지. 한참 그러다가 저기 좀 어둑한 골목이 하나 보이는 거야. 눈에 잘 띄지 않는. 보니까 딱 여기다 싶어. 그래서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맞춤한 집이 하나 있어. 아주머니가 얼마나 반겨 주시던지. 비 내리는 목포 허름한 대폿집에서 소주 한잔. 그런 게 추억이 되는 거 아니겠어?

생각해보니 참 많이도 마셔댔어. 70년대까지는 술값도 없었는데 말야. 정 없으면 어머니한테 가서 그랬어. "저… 어머니 제가 시간을 정확히 맞춰서 움직일 일이 있는데요." 그러면 손목 시계를 하나 주셔. 누가 외상값으로 맡겨 놓고 안 찾아 간 거지. 그게 결국 또 어느 술집에 내 외상값으로 잡히는 거지. 알면서도 주신 거야. 그런 시절이었어. 합승 택시비까지 탁탁 털어서 술 마시고 좌판 같은데 쭈그리고 앉아서 자고…. 김상순 임현식 조경환 이계인 같은 친구들, 다 그 시절 그렇게 함께 어울려 다녔던 술친구들이야.

주량? 왜 주당이라는 말 있잖아, 우린 그 말을 이런 뜻으로 썼어. 마지막까지 안 취하는 사람, 오늘은 소주 마시자 아니면 맥주 마시자 그런 거 정하는 사람, 또 돈이 없더라도 무슨 수를 쓰든지 술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 난 중간 정도로 했지. 주당 노릇 말야. 근데 그 노릇을 할 기회가 갈수록 줄더라고. 다들 자기 차를 갖게 되고 나서부터 아닌가 싶어. 한잔 하자 그래도 운전해야 된다면서 가버리고. 옛날처럼 남들과 가슴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도 사라져가는 거겠지.

은성 얘기 조금 더 하자면, 거기가 74년 문 닫았는데 그게 좀 아쉬워. 명동이 재개발되면서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게 됐는데 어머니께 그만 하시라고 했지. 명동의 낭만이 사라져버렸는데 계속할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더 이상 어머니가 벌지 않으셔도 될 만큼 내가 연기자로 인정받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했고. 근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유품 정리하다가 외상 장부가 나왔어. 숱한 예술가들의 이름과 숫자들… 그 자체로 한 세대의 유물이란 생각이 들더군.

사실은 내가 두어 해 전에 명동에 막걸릿집을 하나 내려고 했어. ○○○○빌딩에 세까지 얻어 놨다가 막판에 무산됐지. 금융위기다 뭐다 어수선하던 때였어. 때를 잘못 잡은 게지. 하지만 그 꿈은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있어.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벌리면 벌고 아니면 마는 거지. 난 내가 자라던 시절의 문화, 어머니가 하시던 은성 같은 분위기가 그리워. 문학,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방송…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가, 지식인들이 한데 어울려서 지지고 볶고 마시던 풍경들. 요새 말로 그게 바로 통섭 아니겠어? 요샌 다들 뿔뿔이 흩어져 얼굴 볼 기회도 없잖아.

좋아하는 술? 그런 거 없어. 남들 마시는 거 똑같이 마시지 뭐. 요즘은 맥주에 소주 타서 마시는 게 유행인가 본데, 나도 그냥 그렇게 마셔. 글쎄 이게 효율적이더라고, 마셔보니까. 취하기도 빨리 취하고 깨기도 빨리 깨고. 목에 넘어가는 느낌도 시원하고. 오늘 저녁? 아냐, 오늘은 대본 연구해야 해. 내일 촬영 있잖아. 본업을 망각할 만큼 마셔선 안 되지. 그 옛날 은성에서도 그랬다고. 그렇게 자유분방한 것 같아도 술 마시고 인사불성으로 제 몫을 하지 않는 놈은 퇴출됐다고. 그럼, 내가 어디서 배운 술인데 말야.

정리=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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