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사는 정모(78) 할머니는 3년 전 아들 집에서 나왔다. 지하 월셋방에 사는 아들 가족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손자들 가르치기도 힘든데 나라도 부담을 덜어주자는 생각'이었다는 정 할머니는 재개발 지역에 월세 10만원 하는 방을 얻어 폐지를 줍고 도라지를 다듬어 팔아 생계를 이었다.
할머니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이웃들은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라고 권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려면 근로능력, 부양의무자 유무, 소득기준 등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정 할머니는 근로능력과 소득이 기준에 부합했고, 아들 둘이 있지만 모두 형편이 어려웠다. 하지만 2008년 여름 동 주민센터를 찾은 정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호적에 부양능력이 있는 다른 자식이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젊었을 때 헤어진 정 할머니의 남편이 새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이었다. 정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 신청 절차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자식한테 연락을 해야 한다고 해서 그만 뒀다"고 말했다.
하지만 점점 몸이 안 좋아지고 일을 못하는 날이 늘면서 한 달에 10만원을 벌기도 힘들었다. 할머니는 지난해 다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다. 이번에는 이웃 주민인 윤덕희(59)씨가 발 벗고 나섰다. 먼저 부양능력이 있는 자식이 친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정 할머니는 윤씨의 도움으로 서류를 작성해 대한법률구조공단을 통해 지난해 12월 친자확인소송을 냈다.
올해 6월 변호사로부터 유전자 검사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다. 유전자 검사를 하려면 30만원이 되는데 그럴 만한 비용이 없었다. 윤씨는 이런 사정을 구청에 호소했고, 서울형그물망복지센터를 통해 무료로 유전자 검사를 받게 됐다. 정 할머니는 이달 10일 부양능력이 있는 친자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신청을 한 지 3년여 만이었다.
정 할머니는 이르면 내달부터 기초생활수급 대상자가 된다. 수급자가 되면 매달 43만6,000원을 받을 수 있다. 정 할머니는 "내가 나랏돈 얻어 먹을라고 이러는 건 아닌데 너무 사는 게 힘들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한국유전자정보센터와 업무협약을 맺어 정 할머니와 같은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는 못하는 노인들을 위해 무료로 유전자 검사를 지원한다고 24일 밝혔다. 서울형그물망복지센터 관계자는"소송까지 하지 않아도 유전자 검사를 통해 친자가 아님이 밝혀지면 바로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이 생긴다"고 말했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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