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법원 형사2부(부장 김용섭)는 지난 20일 1961년 당시 북한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 받은 국내 생존 최고령 독립유공자 구익균(103) 선생 등 5명에 대한 재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통일사회당이 주장했던 영세중립화 통일론은 북한의 연방통일안과 유사하다고 할 수 없으며, 이들이 북한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제창한 것도 아니다"고 판단했다. 지난 6월 1심 재판부도 같은 취지로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법정에는 다른 피고인이 모두 사망한 탓에 구 선생이 유일하게 휠체어에 의지해 자리를 지켰다. 노령으로 함께 한 가족의 귓속말을 통해 겨우 무죄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마침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인정받게 됐다"고 기뻐했다.
24일 서울 서대문구 서울적십자병원 9층 입원실에서 구 선생을 만났다. 그는 선고 다음 날인 21일 병원에 입원했다. 구 선생은 "감개무량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는 "우리는 5ㆍ16 군사쿠데타가 민주주의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박정희 정권이) 독재라 생각해 반대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를 감옥에 무단으로 잡아 넣었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구 선생은 1961년 5ㆍ16 쿠데타 때 통일사회당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통일사회당은 당시 장면 정부가 추진하던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 제정에 적극 반대했다. 또한 영세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쿠데타 직후에 조직된 혁명검찰부는 통일사회당의 통일론을 문제 삼았다. 구 선생 포함 당 간부 10여명을 기소하면서 검찰은 "통일사회당이 주장한 영세중립화 통일론이 북한의 통일론과 같고,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죄목을 걸었다. 법원 역할을 했던 혁명재판소 는 이를 모두 인정했다. 기소된 10여 명에게 집행유예부터 징역 15년까지 유죄를 선고했다. 구 선생은 당시 과거 독립운동을 한 정상을 참작 받아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구 선생은 당시 통일론이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신념의 뿌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통일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20세 약관의 나이로 독립 운동에 투신, 중국 상하이에서 항일운동을 이어가던 그는 1932년부터 안창호 선생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도산을 만나 나라를 구하는 게 비로소 뭔지 알게 됐지. 특히 도산은 민족의 분열을 안타깝게 생각했어. (민족이) 하나돼야 독립할 수 있다고 믿었어."
대법원 판결이 아직 남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무죄임을 확신했다. 구 선생은 끝으로 "내일(25일) 퇴원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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