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오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외곽의 한 주택 마당. 컴퓨터 회로기판 등이 잔뜩 쌓인 마당 한구석에서 일명 '작업철'로 통하는 집주인 김모(48)씨가 누전차단기에서 은 접점을 떼어내고 있었다. 작업철은 폐 전기제품에서 금이나 은 등 각종 비철금속을 분해해 낸 뒤 이를 판매해 수입을 얻는 이들을 가리키는 은어다. 대부분 사업자등록증이 없는 무허가 재활용품 업자들이다. 김씨는 "그냥 내버려두면 폐기물로 처리될 물건들이 내 손을 거치면 금 은 구리 아연 니켈 등 20여 가지의 특수금속으로 되살아난다"고 말했다. 작업철은 도시에 버려진 폐기물 더미 '도시광산'에서 금맥과 은맥을 발굴하는 광부들인 셈이다.
김씨는 이날 하루 작업으로 종이컵 한 컵 분량의 은 접점을 캐냈다. 기다리고 있던 중개상 윤모씨는 그 자리에서 무게를 잰 뒤 현금 50여만원을 김씨에게 건넸다. 은 접점을 떼어내고 남은 은도금 부품은 '은바리'라고 불리는데, 이 또한 컴퓨터 회로기판에서 분해한 '금바리'(금 도금)와 함께 중개상 윤씨의 손으로 넘어갔다. 순도 85% 이상인 은바리는 별도의 확인 없이 넘겨지지만 금바리는 시약을 발라 육안으로 순금 함유율을 판단한 뒤 가격이 결정된다.
중개상 윤씨에 따르면 작업철은 전국적으로 2,000~3,000명에 달한다. 이들이 폐 전기제품 등에서 분해해 공급한 원재료에서 순도 높은 금, 은을 추출하는 업자는 '분석집'이라고 불린다. 분석집은 무허가 제련소를 포함해 국내 100여 곳이 넘는다. 윤씨는 "평균적으로 분석집 1곳에서 추출하는 금이 한 달 평균 1kg(시가 약 7,000만원), 은은 100kg(1억 4,000만원)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놀라운 규모다.
윤씨가 이처럼 작업철들에게 사 모은 금바리와 은바리를 들고 경북 지역의 한 분석집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 기자가 윤씨를 따라 허름한 공장에 들어서자 황산 등이 담긴 커다란 약품통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은바리 한 움큼을 질산액에 쏟아넣고 몇 단계의 처리과정을 거친 후 산소용접기로 가열하자 시뻘건 용액이 되어 녹아내린다. 이 용액은 곧 회백색으로 굳어지며 순도 95%의 은 바(bar)로 재탄생했다.
이렇게 제련된 금, 은은 중개상을 통해 전국의 대형 귀금속 도매상 등으로 팔려나간다. 그 과정에서 분석집은 시가의 15% 정도, 중개상은 10% 정도를 챙긴다. 작업철_분석집_도매상으로 이어지는 거래에서 세금계산서는 물론 단 한 장도 주고받지 않는다. 도시광산 사업은 철저한 무자료 거래로 이뤄진다.
도시광산은 그냥 버려질 폐 전기제품이나 자동차 부품 등에서 희소 금속을 추출해 산업원료로 재탄생시킨다는 점에서 재활용 산업이라 불릴 만하다. 정부도 이 점에 주목, 지난해 폐 금속자원 재활용 대책 세부 시행계획을 마련해 2020년까지 1,000여억원을 들여 지방자치단체 중심의 폐 금속 수거체계를 확립하고, 공공 선별장 설치에 3,3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도시광산의 밑바닥 굴착을 자청하는 작업철이나 분석집 등 영세 업자들의 불만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정부의 대책이 지자체와 허가받은 대규모 업체에만 집중되면서 자신들이 설 땅을 오히려 빼앗길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미신고 재활용품 업자들을 양성화하고 자원의 흐름을 파악하겠다는 폐기물 처리법 개정안도 그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사업장 신고범위를 기존 2,000㎡에서 1,000㎡ 이상으로 확대했지만, 서울의 경우 여기에 해당되는 고물상은 전체 740여 곳 중 35곳에 불과하다. 폐기물 처리는 환경부, 도시광산 활성화 전략 수립은 지식경제부로 각각 나뉘어 정책이 추진되는 것도 문제다.
윤씨는 "정부가 효율성과 경제논리를 앞세워 폐기물 수거체계를 일원화할 경우 '모으면 돈이고 내버려두면 쓰레기'라는 고물상의 격언처럼 연간 수백억원 이상이 쓰레기로 버려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지식경제부의 한 관계자는 이 같은 영세 재활용품 업자들에 대한 지원 대책이나 음성 거래의 양성화 계획을 묻는 질문에 "아직 실태를 파악 중"이라고만 답했다.
글사진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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