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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 위기 거점 국립대를 살리자] (1) 추락한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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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 위기 거점 국립대를 살리자] (1) 추락한 위상

입력
2011.10.23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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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고대 수준 커트라인, 20년 만에 서울 중위권 수준 떨어져

"'강원대라, 이번에 부실대학으로 선정된 곳 아닌가요?' 면접관은 이 한마디를 내뱉고선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더군요. 그 학우는 결국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21일 오후 7시 강원대 춘천캠퍼스 내 실사구시관 1층 강당. 좌석은 물론이고 계단과 문 앞 복도까지 빼곡히 채운 400여명 학생들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고 몇몇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떨구었다.

'지역 서울대'에서 부실대학으로

지난달 교육과학기술부가 강원대를 구조개혁 대상으로 발표한 이후 처음으로 열린 학생비상대책회의. 평가지표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교과부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 것도 잠시, 이내 깊은 침묵이 강당을 에워쌌다. 부실대학으로 낙인 찍혔다는 위기감과 두려움이 학생들을 짓누르는 듯했다.

이재철 강원대 부총학생회장은 "당장 올해 수시지원율이 지난해보다 줄었고, 인터넷엔 강원대 가도 괜찮은 거냐고 불안해하는 수험생들의 글이 떠다니고 있다. 아버지가 79학번 동문이라 아들인 내가 강원대에 입학한 것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셨는데 요즘은 학교 걱정에 밤잠을 설치신다"며 울먹였다.

도서관에서 만난 한 졸업반 학생은 "지난해 경춘선 개통 후 (수도권 대학으로) 편입 준비하는 친구들이 늘어 어수선했는데, 올해는 부실대학이라고 하도 떠들어대니 강원대 다닌다고 말하기도 조심스럽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입학생 수준 갈수록 떨어져

지방 국립대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지방의 우수 인재들은 자기 지역의 거점 국립대로 몰렸다. 경북대를 나와 현재 우리나라 대표 대기업의 부사장에 오른 한 임원은 "조카가 집에서 가까운 경북대를 갈지, 커트라인이 높은 숙명여대를 갈지 고민이라며 묻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일보가 대입배치표를 분석한 결과, 1986년 학력고사 시절 부산대와 경북대의 전자공학과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전자공학과 다음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2007년 배치표에선 동국대와 건국대 그룹에 속했다. 서울의 상위권 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거점 국립대의 위상이 20년 사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신입생들의 학력저하는 교수들이 먼저 체감한다. 한 거점 국립대 공대 박모 교수는 "누군가는 10년째 같은 강의노트를 쓰는 교수를 문제삼지만 나의 경우 10년 전 자료는 쓰려야 쓸 수가 없다. 최근 입학한 애들은 10년 전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내용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허탈해했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지금은 전남대에 모교 출신의 교수들이 꽤 있지만 10년만 지나도 전무할 것"이라며 "자기 대학을 졸업한 연구자를 배출할 수 없다는 것은 삼류 대학으로 전락했다는 의미"라고 우려했다.

국립대 엑소더스, 학력세탁까지

우수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총장부터 발 벗고 나서는 실정이다. 이영덕 대성학력개발연구소장은 "이름 난 국립대 총장님이 직접 서울로 올라와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을 끌어올 묘책을 알려달라고 상담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떠나가는 학생들을 붙잡기엔 역부족이다. 2년 전 충남대를 다니다 인하대로 편입한 A(24)씨는 "학부 때 못했으면 대학원만큼은 반드시 서울로 다녀야 한다는 게 불문율"이라며 "이제는 거점 국립대라도 지방대 출신으로는 대접받고 살기 힘들다 보니 학력세탁은 어쩔 수 없다"고 씁쓸해했다.

수도권 집중화와 사립대 난립

지방 국립대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경제 사회 문화 등 각종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되는 시대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김희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1980년대 이후 지방 공업단지가 사양길에 접어들고 지역경제가 고용능력을 상실하다 보니 좋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우수 학생들은 상경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채 방기한 정부와 학교도 위상추락을 자초했다. 정부가 고등교육을 시장논리에 맡기면서 국립대 경쟁력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백종국 경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995년 김영삼 정부가 대학설립기준완화, 대입정원자율화 등 경쟁원리를 앞세운 5ㆍ31교육개혁을 추진하면서 사립대학이 전체 대학의 80%까지 늘어났다"며 "등록금 책정 등 대학정책의 주도권을 사립대가 쥐고 흔드는 사이 국립대는 방치됐고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반상진 전북대 교육학과 교수는 "기초학문 육성, 지역사회 씽크탱크 역할, 고등교육 기회 제공 등 지방 거점 국립대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며 "거점 국립대를 살려 고등교육 공공성 강화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춘천=강윤주기자 kkang@hk.co.kr

김혜영기자 shine@hk.co.kr

■ 지방국립대 출신 기업임원ㆍ고위관료

요즘과 달리 1950~80년대 지역의 우수 고교생들은 지방국립대로 몰렸다. 그들이 각계 중견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왔다.

삼성전자 임원 중에는 경북대 출신이 63명으로 KAIST(94명), 서울대(78명), 성균관대(69명)에 이어 4번째로 많다(2010년 주요기업 사업보고서 기준). LG전자 역시 부산대(36명), 경북대(24명) 출신 임원이 서울대 출신(47명)만 빼고 가장 많다.

과거 우수 인재들이 '수도권 사립대 대신 지방 국립대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일보가 지방 국립대 출신으로 대기업과 정부부처의 고위직에 오른 이들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CJ제일제당의 부사장~상무급 임원, 신한은행 우리은행의 부행장급 이상 임원, 교육과학기술부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서울시의 실장급 이상 관료 총 14명이 답변을 주었다. 결론적으로 '싼 등록금'과 '차별 없는 취업 보장'이라는 두 가지가, 과거엔 있고 현재는 없는 지방 국립대의 매력이었다.

조재정 고용노동부 노동정책실장은 80년 부산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이유로 "등록금이 서울 사립대의 절반도 안 됐고, 당시 영남 '톱 클래스'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밝혔다. "취업이 잘 돼 고액의'상경 유학'을 감행할 명분이 희박했다"는 것은 대다수 응답자들의 공통된 답이었다. 경북대 83학번의 또 다른 관료는 "싼 학비에 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어 모교를 축복으로 여겼고 당시 대기업, 금융기관 취업도 잘됐다"고 말했다.

이들의 답변이 시사하는 중요한 점 중 하나는 값싼 등록금이 우수 인재를 유치하는 효과가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이다. 2000~2010년 국립대 등록금 누적 인상률은 70.3%로, 사립대 인상률(55.8%)과 누적 물가상승률(37.2%)보다 훨씬 높았다. 지금처럼 등록금 부담이 큰 상황에서는 가난한 인재가 지역 국립대를 지원했던 과거처럼 등록금이 적지않은 지원동기가 될 수 있다.

우수한 인재가 몰리니 지방대 출신이라고 해서 취업에 불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설명이나 지금과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영남대 무역학과 출신의 한 임원은 "학생들 사이에는 무조건 서울ㆍ경기권 대학을 안 나오면 취직이 잘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하다"고 안타까워했다. 노길상 보건복지부 기획조정실장(부산대 사회복지학과 75학번)은 "지방대 출신 쿼터제 등을 다양한 지원을 통해 인재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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