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하루 휴가를 낸 날 마침 집 앞에 장이 섰다. 이것저것 고르고 있는데 아이가 시장 끄트머리를 가리키며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참 용케도 봤다. 국수가게였다. 우리 아인 유난히 국수를 잘 먹는다. "엄마 엄마, 국쭈 먹구 가자" 하길래 장 보다 말고 잔치국수를 한 그릇 시켰다. 면을 후후 불어가며 아이 숟가락에 올려줬다. 당근도 호박도 같이. 그런데 요 녀석이 고개를 팽 돌리며 "당근 시여" 한다. 사실 집에서도 그런다. 당근, 콩, 파 골라내기 선수다. 채소를 골고루 먹여야 하는데, 이럴 때마다 참 난감하다.
채소나 과일 같은 식물에는 건강에 좋은 생리활성물질이 유독 많다. 몸을 움직여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동물과 달리 식물은 스스로 이동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생리활성물질을 많이 만들어내도록 진화해왔다. 이들 물질이 강한 자외선이나 독성물질, 물리적인 스트레스 등 외부 환경의 위험으로부터 식물을 보호하는 것이다. 식물 몸 속의 이 같은 생리활성물질은 사람 몸에 들어와서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식물의 생리활성물질은 '파이토뉴트리언트'라 불린다. 2,500여 가지나 되는 파이토뉴트리언트는 흥미롭게도 채소나 과일 고유의 색깔에 따라 크게 5개 그룹으로 분류된다. 양파 버섯 마늘 같은 흰 채소에 들어있는 파이토뉴트리언트는 뼈와 혈관을 튼튼히 한다. 호박 옥수수 레몬 같은 노란 식물엔 성장기 건강에 좋은, 토마토 사과 고추 같은 빨간 식물엔 면역력을 길러주는, 양배추 고구마 포도 같은 보라색 식물엔 심장과 뇌를 튼튼히 하는, 시금치 완두콩 피망 같은 초록 채소엔 눈과 뼈에 좋은 파이토뉴트리언트가 들어 있다. 이들 5색 채소와 과일을 골고루 먹어야 파이토뉴트리언트를 영양학적으로 균형 있게 섭취하게 된다.
한국식품과학회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채소와 과일을 1일 권장량 이상 섭취하는 한국인 2,17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밥상에 가장 많이 오르는 채소나 과일은 흰색류였다. 다음은 노란색, 보라색, 초록색, 빨간색 순이다. 빨간색과 초록색 채소ㆍ과일을 기준 이상 섭취하는 사람은 조사 대상자의 각각 7.4%와 8.6%에 불과했다. 한국식품과학회는 "국민 대부분이 5색 채소와 과일을 골고루 챙겨먹고 있지 않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아이에게 채소를 골고루 먹이려고 꾀를 냈다. 국수에서 당근 호박 파 한 조각씩을 건져 아이 몰래 숟가락에 먼저 얹고 그 위에 면을 올렸다. 면발 속 채소를 눈치 못 챈 아이가 오물거리며 맛있게 받아 먹었다. 그리곤 국수 한 그릇을 거의 다 비우더니 볼록해진 배를 만지며 "엄마, 사장님 배야" 했다. 흐뭇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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