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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너무 다른 김 병사와 프리맨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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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너무 다른 김 병사와 프리맨의 죽음

입력
2011.10.2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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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군인사망 보상금 5,000원' 기사가 '한국전쟁 사망 보상금 4달러'라는 제목으로 미국 언론에 보도돼 주목을 받았다. 오빠 김 병사의 전우였던 미국의 노병들은 블로그에 기사를 전하며 아쉬움과 허탈함이 밴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노병들은, 죽어서까지 수모를 겪은 김 병사와는 너무 다른 소식에 안도했다. 60년 만에 유해로 귀향한 프리맨 이야기는 살아남은 자가 갖는 빚을 덜기에도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집요하고도 철저한 유해 확인 작업

미국 버지니아주의 풀라스키에서 얼마 전 한국전쟁 참전용사 프리맨 홉킨스 린드세이의 장례식이 엄수됐다. 가족 중 가장 먼저 치러야 했을 장례식은 부모, 형제가 모두 숨진 뒤에야 거행됐다. 사망한 지 60년이 넘은 지난달에야 그의 유해가 수습됐기 때문이다. 군이 프리맨의 마지막 길을 군 최고 장례절차인 '풀 아너스'로 예우하며 영웅으로 대우한 것은 물론이었다.

프리맨과 김 병사가 숨지기까지 과정은 여느 병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김 병사는 1950년 18세의 나이로 입대해 그 해 11월 전사했고, 20세의 프리맨은 비슷한 시기 북한 장진호 전투에 투입된 뒤 실종됐다. 프리맨이 사망자로 바뀐 것은 지난달 미군이 유해를 찾아내면서였다. 놀라운 것은 국방부가 조카들에게 보낸 유해 발견 과정 서류 뭉치였다. 국방부 집념의 기록인 서류는 분량이 책 한 권은 족히 될 200쪽에 달했다. 미군은 북한과 협상을 통해 1991~1994년 208 상자의 미군 유해를 인도받았는데 200~400명의 유해가 엉켜 있었다. 당시 프리맨의 유해도 상자 여기저기에 섞여 있었다. 이것으론 충분치 않다고 본 미군은 직접 북한에 들어가 1997년 장진호 주변에서 프리맨의 유해를 추가로 발견해냈다. 그러나 이름 모를 유해에서 프리맨을 확인하는 작업에도 1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미군은 숨지기 전 형제들에게서 채취한 혈액으로 DNA를 비교해 프리맨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망 원인도 1951년 2월 장진호 포로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숨진 것으로 수정했다. 이처럼 집요한 노력과 잔인할 만큼 철저한 사실확인은 인류학자, 고고학자 400여명으로 구성된 미군 포로실종자확인 연합사령부(JPAC)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프리맨의 영면은 생전의 가족과, 다른 전우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의 결실이기도 했다. 동생 찰스는 형을 찾기 위해 군에 입대까지 했고, 참전군인 후손이 세운 코리안 워 프로젝트 등은 프리맨을 찾는 노하우를 가족에게 제공했다. 가족과 사회, 그리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군인에게 무한책임 약속을 이행한 국가의 의지가 모아져 프리맨의 귀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미군은 제2, 제3의 프리맨을 찾는 미군 유해발굴 작업인 '영광의 작전'을 곧 북한에서 재개할 예정이다. 미군이 한국에서 찾는 유해는 모두 7,993명이다. 한국군은 이보다 16배 많은 13만여명이 무명용사로 남아 있다.

무명용사를 잊고 사는 사회

설렁탕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김 병사 사망 보상금 5,000원 사건에 공분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프리맨의 이야기는 5,000원에 분노하기에 앞서 우리가 잊은 게 없는지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지금의 공분은 김 병사와 구천을 떠도는 무명용사를 잊고 지낸 우리 자신과 사회의 미안함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태규 워싱턴 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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