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책과세상/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미국의 복지 비웃는 유럽인의 행복… 비결은 세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책과세상/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미국의 복지 비웃는 유럽인의 행복… 비결은 세금

입력
2011.10.21 17:31
0 0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토머스 게이건 지음ㆍ한상연 옮김/부키 발행ㆍ392쪽ㆍ1만5,000원

미국 변호사가 친구 빌과 함께 파리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카페에서 나온 커피는 역시 미국인의 입에는 썼다. '아메리카노'가 아니고 '프렌치'니까. 그래서 빌이 커피에 우유를 타 달라고 요구하자 웨이터의 반응이 걸작이다. "선생님, 어머니가 그리우십니까."

유럽과 미국은 다르다. 우리 눈엔 다 같은 서양인으로 보여도 이들은 문화, 생활방식, 생각이 다르다. 물론 사회제도도 커피 문화 못지않게 다르다. 복지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는 미국의 한 노동 전문 변호사가 유럽과 미국의 복지 제도를 비교한 책이다. 정확히 말하면 독일 등 서유럽 국가의 복지, 노동 제도가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뒤덮여 열악하기 짝이 없는 미국보다 얼마나 훌륭한지를 풍부한 체험을 섞어 예찬한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60년대까지는 미국이 유럽보다 훨씬 좋았다고 말한다. 유럽에 갔다 온 아이에게서 "자동차 매연 때문에 목이 아팠어, 아직도 손으로 돌리는 전화기를 쓴대"라는 말을 곧잘 듣던 시절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그 즈음까지 미국은 유럽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역사가 깊고 괜히 멋 있어 보이는 것 말고는.

물론 지금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만 따지면 미국은 서유럽의 웬만한 나라들보다 잘 산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미국 대도시의 평균적인 직장인은 애들 교육 때문에 학군 좋은 교외에 사느라 도심으로 출퇴근하며 교통체증에 시달린다. 오후 6시 '칼' 퇴근은 '저를 잘라 주세요'라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진해 야근한다. 밤 10시에 사무실을 나서서 집에 오면 아이들은 자고 있고 몸은 녹초다. 씻고 TV를 멍 하니 보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주말? 출근할 때가 더 많아 여가생활 같은 건 꿈꾸기 어렵다.

하지만 서유럽의 비슷한 대졸 중산층은 잘 갖춰진 대중교통 덕에 버스나 전철로, 가끔은 자전거로 출근한다. 물론 정시 퇴근이고 초과 근무는 웬만해서 없다. 퇴근길에 비용을 모두 국가에서 대주는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저녁식사 후 동네 주점에 가 맥주 한 잔 하며 잡담할 여유도 있다. 주말 근무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 매년 한달 반 정도 휴가는 꼭 써야 한다.

여러 차례 유럽을 여행했고, 서유럽을 제대로 알기 위해 작심하고 두 달간(미국 변호사에게 이 정도는 보통 사람의 2년 휴가란다) 독일에서 살기까지 한 저자의 해석은 이렇다.

미국의 높은 GDP는 한 명의 빌 게이츠와 6명의 거지의 조합에서 나오는 통계적 착시일 뿐이다. 미국인은 마구잡이로 개발하고 무한정 이동하며 대형 쇼핑몰에서 낭비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낭비와 비효율이 성장을 촉진한다. 게다가 미국의 GDP는 월가의 다양한 금융업, 각종 투기업 등의 도박에서 창출된다. 지나친 노동유연성 때문에 늘 정리해고의 불안감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노동시간이 늘어날수록 미국의 GDP는 상승한다. 요리할 시간이 없으니 사 먹어야 하고 욕실 청소할 짬이 없어 도우미를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고장 난 물건은 그냥 버리고 새로 산다.

반대로 유럽인이 미국인보다 소비자로서 더 나은 삶을 사는 까닭은 뭘까. 세금을 더 많이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정부가 국민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구입 목록에 있는 것이 퇴직연금, 의료보험, 교육, 대중교통, 보육 같은 것이다. 미국인은 자기가 알아서 직접 사야 하는 이런 공공재를 대량으로, 그리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유럽인은 세금을 많이 내고도 남은 돈을 여유 있게 쓸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인이 세금을 턱없이 적게 내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세금은 유럽의 5분의 4 정도이지만 납세자들이 받는 서비스는 크게 뒤진다. 미국에서는 세금의 상당 부분이 민간 보험회사와 제약 회사, 응급병원 의사 같이 공공재가 되어야 할 것을 중간에서 가로채 폭리를 취하는 부류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너무 일방적인 유럽 예찬으로 들릴 만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유럽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하면서 좌파는 좌파대로 정부에 푸념을 늘어놓고, 우파는 우파대로 '세금을 다 내려면 1년의 절반을 나라를 위해서 죽도로 일해야' 한다고 욕한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노동자의 적극적인 경영 참여나 각종 노동 조직의 왕성한 활동 때문에 독일에서는 사회적 신뢰가 강하지만 그 때문에 외국인 혐오증 같은 보수적 현상이 강해질 수 있다는 비판도 놓치지 않았다.

담론만 무성한 한국의 복지 논쟁이 좀 지겨운 사람들에게, 요즘 화제가 된 다른 책의 제목을 패러디 한 이 책의 홍보 문구(복지논쟁 100번보다 닥치고 이 책 한 권!)가 마음에 쏙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독일이든, 스웨덴이든, 덴마크든 서유럽인들이 어떤 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고, 그러기 위해 도대체 어떤 부담을 하는지 저자처럼 그 곳에서 살아 본 사람 이야기를 솔직하게 듣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들의 길이 정말 '우리의 길이 되어야' 하는지 알고 싶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