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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사람/ 성희롱 의혹 고대교수 자살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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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사람/ 성희롱 의혹 고대교수 자살 1년

입력
2011.10.2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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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9일. 남편의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조교를 성희롱 한 혐의로 학교 측의 조사를 받으면서부터 남편은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명정애(42)씨는 남편이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교회 모임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오후 7시쯤 고려대로 갔다. 주차장에 남편의 오토바이가 주차돼 있었다. 하지만 남편 연구실은 잠겨 있었다.

'인간이 무섭다. 나는 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이렇게 방황하는가.' 사흘 전 남편이 보낸 문자 메시지가 머리를 스쳤다. 경비원을 불러 문을 땄다. 목에 노끈을 감은 남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성희롱이 인정돼 징계가 요구된다'는 학교 측 통지서가 놓여 있었다. 명씨의 남편은 1년 전 바로 그날 "성희롱 혐의를 받은 것이 억울하다"며 자살한 정인철(당시 42세) 전 고려대 수학교육과 교수다.

사연은 이렇다. 같은 과의 황모 교수는 지난해 8월 교내 성폭력 조사기관인 양성평등센터에 '정인철 교수가 박사과정 대학원생 김모씨를 성희롱했다'고 신고했다. 두 달 가량 정 교수의 성희롱 의혹을 조사한 센터는 10월 19일 성희롱 사실이 인정된다는 내용의 심의 결과 통지서를 정 교수에게 전달했다. 정 교수는 이날 A4용지 3장 분량의 유서를 남기고 고려대 운초우선교육관 7층 자신의 연구실에서 목을 맸다.

하지만 정 교수의 성희롱을 둘러싼 공방은 1년째 계속되고 있다. 센터는 ▦정 교수가 2009년 9월 교내 인촌기념관 근처 벤치에서 대학원생인 김씨에게 영어 알파벳 A부터 Z까지 발음지도를 하면서 김씨 허벅지를 만졌고, Z 발음을 할 때는 김씨로 하여금 자신의 목젖을 만져보도록 한 것 ▦2010년 4월 학회 참석차 간 충남 공주의 한 마트에서 김씨의 어깨에 손을 얹은 것 등을 성희롱 사례로 꼽았다.

그러나 정 교수는 이를 부인했다. 그는 지난해 8월 센터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영어 발음 지도를 할 때 김씨의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주먹을 가볍게 쥐고 어깨를 한 번 친 것이 전부다. 다른 여자 대학원생도 함께 있는 공공장소(마트)에서 성적 수치심을 일으킬 만한 접촉을 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부인 명씨도 최근 정 교수가 김씨와 주고 받은 이메일을 공개, 성희롱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가 영어 발음 지도를 하며 성희롱을 했다는 지난해 9월 28일 다음날인 29일 오전 1시30분쯤 김씨가 정 교수에게 보낸 메일에는 '특히 발음 지도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교수님 시간이 허락되는 한도에서 자주 연락 드리고, 얼굴 뵈었으면 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성희롱을 당했다면 피해 당사자가 사건 직후 정 교수에게 감사의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느냐는 게 명씨의 주장이다.

명씨는 "이 성희롱 사건은 근본적으로 고대 내 교과교육연구소의 운영을 정상화하려던 정 교수를 배제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 역시 유서에서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전남대 수학교육과 교수였던 정 교수는 고대 황 교수의 권유로 2009년 3월 고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김씨와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1년 뒤인 지난해 4월부터 황 교수가 소장으로 있던 교내 교과교육연구소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담당하게 되면서 김씨와 갈등이 생겼다는 것이다. 황 교수의 애제자로 8년 전부터 연구소 일을 맡아온 김씨와 연구소 운영을 놓고 마찰이 있었고 이후 김씨의 성희롱 주장이 제기됐다는 게 정 교수 가족들의 주장이다. 정 교수는 특히 성희롱 고발을 당한 뒤 대학원 강의에서도 제외됐다. 이와 관련, 명씨는 "정 교수가 연구소 재정 문제까지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보복을 당한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로부터 1년이 흘렀지만 진실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당시 연구소에서 정 교수와 김씨의 갈등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이들은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통화를 거부했다. 황 교수는 기자에게 "정 교수 유족 측이 양성평등센터를 상대로 소송을 한 것이므로 나는 할 말이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장한 김씨는 지난해 8월 교과교육연구소의 연구교수로 임용됐다. 기자가 19, 20일 두 차례나 찾아갔으나 김씨는 연구소에 없었다.

고대도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명씨는 지난 7일 고대를 상대로 한 양성평등센터 심의자료 정보공개 거부 취소소송에서 승소했으나 고대는 자료를 내놓지 않고 있다. 고대의 한 교수도 "교내에 이 사건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세력이 있는 것 같다"며 "교수들도 이 사건을 섣불리 이야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실 정 교수의 자살 직후 인터넷 아고라에서는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이 벌어져 수천명이 서명했고 진상규명위원회까지 만들어졌다. 가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 교수의 인품을 잘 아는 지인들이 주도한 신원(伸寃)운동이었다. 지난달 중순부터 일주일에 한 차례 고대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 중인 명씨는 "남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 너무나 궁금하다"고 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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