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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변하는 '최후통첩게임' 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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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변하는 '최후통첩게임' 룰

입력
2011.10.2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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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신에게 10만원을 주면서 옆 사람과 나눠가지라고 한다. 단 조건이 있다. 옆 사람이 나눠준 돈을 받아야 두 사람 모두 돈을 가질 수 있다. 옆 사람이 거절하면 둘 다 한 푼도 받지 못한다. 과연 당신은 10만원 중 얼마를 옆 사람에게 나눠줄 것인가.

시장의 합리성을 따르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면 100원(10원짜리 동전은 구하기 어려우니까)을 옆 사람에게 주고 자신은 9만9,900원을 챙길 것이다. 옆 사람 입장에서 돈 받기를 거절해 한 푼도 건지지 못하는 것보다는 100원이라도 받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할테니까. 그러나 실제론 반씩 나누려는 선택이 가장 많았다. 또 20% 이하의 돈을 나눠주면 옆 사람들은 대부분 거절하면서 한 푼도 받지 않는 것을 택했다.

1982년 독일에서 고안돼 널리 알려진 '최후통첩게임'을 언급한 것은 오랫동안 암묵적으로 지켜지던 최후통첩게임의 룰이 최근 전 세계에서 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80년대 말 사회주의 붕괴 이후 지구촌을 석권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대기업ㆍ부유층의 지갑이 넘쳐 흐르면 저절로 중산층ㆍ중소기업ㆍ서민에게 흘러 들어 모두 잘 살게 된다'는 논리를 앞세워 부의 집중을 정당화해왔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의 역사는 이 같은 '트리클다운(trickle-down) 효과'가 거짓이거나 적어도 매우 더디다는 점을 보여줬다. 여기에 천문학적 혈세로 겨우 소생시킨 거대 금융회사들이 또다시 고액 배당ㆍ보너스 잔치를 벌이려 하자, 아직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99% 계층의 울분이 폭발했다. 미국 월가 시위대 일각에서 제기된 "일제히 은행예금을 인출하자"는 주장은 세계경제가 최후통첩게임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만일 중산층ㆍ서민들이 자신들의 예금을 포기할 각오로 은행에 몰려가 인출을 요구한다면 파산을 피할 수 있는 은행은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구석구석 뿌리내린 신자유의주의적 최후통첩게임의 룰이 흔들리고 있다. 외식업체들이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를 요구하며 18일 집회를 열자 여야 정치인들이 몰려가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후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요구는 주유소, 유흥업소, 동네 의원들로 확산되고 있다. 중소 납품업체 직원들을 머슴처럼 부리는 관행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오던 백화점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앞장서 수수료 인하를 압박하는 것도 게임의 룰이 변하고 있고 또 변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대기업과 기득권 집단은 이같은 거대한 변화에 여전히 눈속임이나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은행을 향해 '탐욕'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전국은행연합회가 얄팍한 '통계 마사지'로 "은행 임금은 대기업보다 높지 않다"며 사실을 호도한 것이 일례다. 시중은행 중 임금 수준 상위권인 외국계 은행을 제외하고 평균임금을 산출해 지난해 제조업 대비 금융업 임금 비율에서 우리나라가 157%로 일본(132%) 미국(128%)보다 높다는 사실을 왜곡했다. 게다가 제조업 대비 금융업의 노동생산성은 한국이 101%에 불과한 반면 미국(123%) 일본(127%)은 제조업보다 높았다는 점은 외면했다. 은행의 탐욕은 미국이나 일본보다 우리나라에서 훨씬 심하다.

일부 카드사와 백화점들도 여론과 정부의 압박을 부당한 간섭이라고 반발하기 보다는 최후통첩게임의 파트너인 중소 가맹점과 협력업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룰을 제시하는 혜안이 필요하다. 이들이 무너지거나 게임장 밖으로 뛰쳐나간다면 카드사도 백화점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영오 경제부 차장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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