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시르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무아마르 카다피는 왕정국가를 제외하고는 현존 지도자 중 최장기간인 42년을 집권했다. 서방은 카다피를 ‘미친 개’ ‘이단아’라 불렀지만, 반미 진영에서 그는 반 제국주의의 선봉장이었다.
카다피는 1942년 중부 해안도시 시르테 인근 사막의 베두인족 천막에서 태어났다. 이집트의 근대화를 이끈 가말 압델 나세르(1918~1970)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 그는 19세 때인 61년 벵가지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서방 편향적인 왕정에 반감을 갖고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를 동경하던 카다피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69년 9월 1일. 대위 카다피와 그가 결성한 자유장교단은 이드리스 국왕이 신병 치료차 터키로 출국한 틈을 타 정부를 무혈 접수한 뒤 왕정을 철폐했다.
27세 나이로 국가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카다피는 외국 군대와 외국인들을 몰아내는 등 철저한 반서방 노선을 폈다. 77년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한 뒤 ‘인민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의회와 헌법을 폐기, 전제권력자의 길로 들어섰다.
카다피가 서방의 공적이 된 것은 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추락한 미 팬암 항공사 소속 여객기의 폭파사건이었다. 탑승자 259명이 전원 사망한 사건에 대해 91년 미국과 영국은 리비아 정보요원이 팬암기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발표했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이어졌고, 유엔은 리비아 제재에 나섰다.
2000년대 들어 리비아가 폭파 책임을 인정하면서 유엔은 제재를 해제했고 철수했던 미 석유회사가 30년만에 리비아로 복귀하는 등 서방관계는 개선됐다.
철권은 아랍권에서 불어온 민주화 바람에 무너졌다. 지난해 말 튀니지에서 촉발된 반정부 시위가 2월 벵가지 인권운동가의 체포를 도화선으로 리비아까지 번진 것.
2월 17일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수십명이 사망한 이후 26일 유엔이 카다피에 대한 제재에 착수하며 국제사회의 개입이 시작됐고, 3월 19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공습을 개시, 카다피의 운명은 급격히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다짐처럼, 풍운아 카다피는 망명이나 투항을 거부한 채 끝까지 저항하다 트리폴리 함락 두 달 만에 고향에서 굴곡진 69년의 삶을 마감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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