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네가 정신분열병이라고 차마 얘기해줄 수 없었어요. 다중인격자나 범죄자가 된 듯해 얼마나 상처받을까 싶어서요."
주부 유모씨의 아이는 어릴 때 자주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친구들이 자신을 저주한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수군대며 자신을 흉보고 다닌다고 했다. 보다 못한 유씨는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소아정신분열병이란 진단을 받았다.
정신이 갈라져… 심한 혐오 유발
"처음 그 병명을 들었을 땐 세상이 끝난 것 같았어요. 정신이 갈가리 나뉘어졌다니요. 너무 무섭고 혐오스럽잖아요. 정신분열병 환자 하면 치료가 불가능하고 어디 꼭 가둬둬야 할 것처럼 생각하니까요. 주변에 엄청난 폐를 끼칠 것처럼 말이죠. 병 이름이 환자에 대한 낙인이 되어버리는 거죠."
유씨의 아이는 병을 앓는 동안 주변에 피해를 주는 행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24시간 내내 계속 망상에 시달린 것도 아니었다. 정상적인 대화나 생활이 가능할 때가 많았다. 아이는 꾸준히 치료를 받은 결과 고등학교 1학년인 지금 병세가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다.
정신분열병에 대한 의사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신과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한 설문조사에서 정신분열병 진단이 나오면 환자나 가족에게 바로 알려주느냐는 질문에 항상 그렇다는 대답은 28%에 불과했다.
국내 유병률이 인구의 0.5~1%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정신질환인 정신분열병이 '조현병(調絃病)'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조현'은 '현악기의 줄을 고르다'란 뜻이다. 악기의 줄이 잘 맞지 않으면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 환자의 신경계에 일부 이상이 있어 행동이나 마음에 문제가 나타나는 병이라는 과학적 의미를 악기에 비유에 은유적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17일 법안심사소위를 열어 정신분열병을 조현병으로 개명하는 내용을 담은 약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남은 절차는 상임위(보건복지위)와 본회의 통과다. 순조롭게 진행하면 올해 안에 개정법률을 공포할 수 있다. 정신분열명 명칭을 담은 최상위법인 약사법이 개정되면 우리나라 모든 법에서 정신분열병이 조현병으로 바뀌게 된다.
개명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다. 바로 유씨 같은 환자와 의사들이다. 자신의 아이를 비롯한 많은 정신분열병 환자들이 병명 때문에 차가운 시선과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지켜본 유씨는 2007년 만들어진 '정신분열병 병명개정위원회' 활동에 발 벗고 나섰다. 환자와 가족 단체, 대한정신분열학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복지사협회, 임상심리학회 회원, 변호사 등이 참여한 이 위원회는 정신분열병을 대신할 30여 개의 새로운 병명을 만들었다. 전문가 의견수렴을 거쳐 지난해 11월 최종으로 정한 게 바로 조현병이다.
정신분열병은 스키조프레니아의 직역
정신분열병은 영어의 'schizophrenia'를 일본에서 그대로 번역한 말이다. 라틴어에서 온 'schizo'는 '분리됐다'는 뜻이고, 'phrenia'는 '막'을 의미한다. 1908년 스위스 취리히대 심리학자 오이겐 블로일러 교수가 망상 같은 증상을 마음이 분리돼 생긴 병이라고 생각해 붙인 이름이다. 당시엔 마음이 횡격막 근처에 있다고 여겼다. 현대 정신의학으로 보면 분명 잘못된 이름이다. 정신분열병은 정신이 분리돼서가 아니라 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미 2002년에 정신분열병을 '통합실조증(統合失調症)'으로 바꿨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거나 조화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개명 뒤 일본에선 환자에 대한 편견이 줄고 치료 효율성이나 인권 측면에서 개선됐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홍콩 역시 정신분열병을 '사각실조증(思覺失調症)'으로 바꿨다. 생각과 감각이 조화롭지 못하다는 의미다.
의학계는 바뀐 이름 덕분에 치료 받는 환자도 늘고 치료 효과도 한결 좋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권준수 교수는 "이름 때문에 그 동안 많은 환자들이 병원 오길 꺼려했던 게 사실"이라며 "요즘은 약물치료나 인지행동치료 등으로 조현병 환자도 얼마든지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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