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단어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이번 소설도 그래. 그걸 장악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3인칭을 쓰려면 무서워. 그라고 쓰면 그가 어떤 놈인지 알아야 하는데 참 어려운 일이야."
어떤 현상이나 인물을 전면적으로 장악해야 그 단어를 쓸 수 있다는, 이 도저한 자의식의 소설가는 김훈(63)씨다. 그의 특장이 역사소설에서 발휘되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역사는 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흐르는 세상사의 질서까지 수억만년을 더듬으며 전면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역사소설로 돌아왔다. 60만부의 판매고를 기록한 <남한산성> 이후 4년 만이다. 올해 4월 경기 안산시 선감도 경기창작센터에 입주해 5개월 만에 원고지 1,135매 분량으로 탈고한 <흑산> (학고재 발행)이다. 20일 서울 삼청동의 한 식당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신유박해(1801)와 병인양요(1866) 사이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많은 지식인과 백성의 이야기를 쓴 소설이다"고 말문을 열었다. 흑산> 남한산성>
소설은 그 중 천주교를 배교한 뒤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한 평생 물고기만 관찰하다 생을 마친 정약전과 신유박해 당시 '백서 사건'으로 능지처참형을 당한 황사영 두 인물을 축으로 당시의 조정과 양반 지식인에서부터 마부나 노비 등 밑바닥 백성까지 두루 등장시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그려낸다.
세상 너머를 슬쩍 엿봤다가 현세로 돌아온 배교자와 세상 질서에 맞서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내면이 중심적 대립 축이다. 유배지에서 입을 닫고 어류생태학 저서인 <자산어보> 를 남긴 정약전이 가치중립적 실증 세계라면, 천주교와 함께 당시 유행하던 정감록의 영향을 받은 황사영은 종교적 구원의 세계다. "자유나 사랑,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과 그것을 버리고 현세로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약전은 아무런 책도 언어도 없는 섬에 가서 오직 물고기를 들여다 보다 죽었는데, 그 생애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기막힌 슬픔이 느껴진다." 자산어보>
이를 중심으로 적극적 배교자, 배교하고서도 죽은 이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펼쳐진다. 정약현ㆍ약전ㆍ약종ㆍ약용 형제들을 비롯해 주요 등장인물만 20명. 형식적 주인공은 정약전이지만,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선택을 드러내도록 한 것이다. 작가는 "배교의 최정상에는 정약용이 있었는데, 동료 교인들을 효과적으로 잡는 방법까지 밀고했다"며 "그게 그의 학문적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그것도 그의 선택이었을 뿐이다"고 말했다. 작가는 이어 "어차피 현실에선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라는 생각에 정약전의 주인공 자리도 박탈해서 대등하게 했다"며 "앞으로도 소설에서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가 궁극적으로 초점을 둔 것은 숱한 개인적 선택 뒤에 흐르는 역사의 장구한 흐름이다. 그는 뜻밖에도 다윈 이야기를 꺼냈다. 책을 쓰는 동안 다윈을 떠올렸다며 "오늘 아침에도 <종의 기원> 을 100페이지 읽고 나왔다"고 했다. "다윈이 말한 진화는 수억만년의 시공을 건너가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종족을 도태시키며 생명을 변화시키는 것인데, 그 변화의 동력이 자유나 이성, 윤리 같은 이상적 목적이 아니라 거대하고 장엄한 자연의 질서다. 그 장대한 흐름의 끝에서 정약전이나 황사영이 꿈꾼 자유나 사랑이 만나는 미래를 그려보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간 지식인의 현란한 이데올로기를 혐오하면서 먹고 살기 위한 인간의 육체성을 강조해왔던 김훈 특유의 문제의식이 나아간 곳인 셈이다. 종의>
이는 책 표지 그림에도 이어져 있다. 작가 스스로 '가고가리'라고 이름 붙인 기괴한 모양의 괴수가 하늘을 날아가는 그림인데 그가 직접 그렸다. 그는 이를 "다윈의 새"라고 불렀다. "소설을 다 쓰고서 머리 속에 남은 영상을 그렸다. 원양을 건너가는 새, 대륙을 건너가는 말, 바다를 건너가는 배 등 멀리 가는 것들을 합성해서 진화의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체를 그린 것이다. 배교자나 순교자들이 그런 진화의 앞날을 향해 수억만년의 시공을 건너가는 존재로 읽히기를 바란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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