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유서 깊은 항구도시 찰스톤을 들른 적이 있다. 어디를 구경할까 망설이다가 관광안내센터의 권유로 헤이워드_워싱턴 저택에 맨 먼저 갔다. 이 저택은 1772년 대농장주 다니엘 헤이워드가 훗날 독립선언문 서명자 중 한 명이 된 아들 토마스 헤이워드를 위해 지어준 집이다. 저택 이름에 워싱턴이 추가된 것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1791년 찰스톤에 들렀을 때 1주일간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자원봉사 할머니는 워싱턴이 묵었던 침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소개하면서 덤덤한 표정의 기자를 화난 듯 째려보았다.
■ 그 할머니가 화난 이유는 미국 독립운동 지도자인 헤이워드가 살고 국부인 워싱턴 대통령이 묵었던 역사적인 저택에 왜 감동받지 못하느냐는 것이었다. "미국인한테 워싱턴이지, 한국인까지 워싱턴이 잠을 잤던 침대에 경의를 표하라는 것이냐"는 반발심리가 생겨 더욱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실수였던 것이 이 할머니는 기자를 놔주지 않고 방마다 데리고 다니고 심지어 헛간까지 보여주면서 워싱턴과 미국 역사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침을 튀면서까지 설명하는 열성에 끝까지 끌려 다니다가 저택을 나섰을 때는 거의 1시간이 다 지나서였다.
■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 할머니가 생각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논란 때문이었다. 워싱턴이 불과 1주일 묵은 저택조차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만약 이 대통령이 내곡동 사저를 택했다면 먼 훗날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홍보할 수 있을까 막막했다. 이 대통령뿐만 아니라 다른 역대 대통령들의 사저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장기집권, 군사쿠데타, 가족과 측근의 비리, 국정 실패 등으로 역대 대통령들이 상처를 많이 입기도 했지만, 사저의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지 못해 역사적 사실들을 설명할 길도 없는 형편이다.
■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퇴임 직전 새로 짓다시피 증축했고,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각각 상도동, 동교동 집을 새로 지었다. 상도동이나 동교동 집은 민주화의 산실이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예 신축을 했으니 숱한 사연과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됐다.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이승만 대통령의 이화장(梨花莊), 임시정부 수반인 김구 선생의 경교장(京橋莊), 윤보선 대통령의 안국동 가옥 정도다. 우리도 침 튀기면서 자랑할 유적을 갖기 위해서라도 향후 대통령들은 퇴임 때 원래 살던 집으로 그대로 들어가면 어떨까 싶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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