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편집국에서] 유로의 역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편집국에서] 유로의 역설

입력
2011.10.19 11:43
0 0

미국은 애초 유로화의 탄생을 못마땅해 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유로화 단일통화 논쟁이 한창이던 1999년 "훌륭한 아이디어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코웃음쳤다. 자존심 강한 유럽국가들이 자국통화를 절대 내던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미국의 냉소적 태도는 유로화가 세상에 나올 때도 계속됐다. 워싱턴포스트의 보수파 논객인 조지 윌은 불과 유로 출범 일주일 전까지 "기념비적인 이정표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할 것"이라고 유로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점쳤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2002년 1월1일 출범한 유로화는 나오자마자 달러를 위협했다. 2개월 뒤 유로당 86센트에 거래되던 유로는 2년 뒤에는 50% 이상 폭등한 1.3달러로 달러 가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수십년 간 도전받지 않던 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절대적 지위를 유로가 대신할 것이라고 세계는 흥분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가장 성공적인 화폐 통합이라는 찬사가 잇따랐다.

미국이 유로의 탄생을 마뜩잖게 생각한 것은 유로가 유럽합중국으로 가는 마지막 열쇠라고 본 때문이다. 미합중국에 맞먹는 덩치 큰 유럽의 출현을 두려워한 미국이 유로의 성공을 바라지 않은건 당연했다.

거대 시장 유럽을 떠올릴 때 미국인들의 뇌리에 가장 선명한 기억은 미국을 대표하는 두 기업 제너럴일렉트릭(GE)과 하니웰의 합병 실패다. GE의 전설적 CEO 잭 웰치가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심혈을 쏟았던 두 회사의 합병을 가로막은 것은 뜻밖에도 유럽이었다. 미국 법규만 통과하면 될 줄 알고 자신만만했던 웰치는 거대 시장으로 변모한 유럽이 반독점법을 걸어 합병을 반대하자 "미국 기업끼리의 합병을 유럽이 왜 막느냐"며 항의했다. 결과는 웰치의 완패였다. 유럽에 압력을 넣기 위해 조지 W 부시 대통령까지 동원한 미국은 완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낡은 발상에 갇혀 있다는 비난을 받았고, 미국민의 우상이었던 웰치는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지 못한 CEO라는 오점을 안고 다시 은퇴했다.

유럽통합으로 가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유로가 10살 생일을 몇 달 앞두고 유럽분열의 주범이라고 비난받는 것은 아이러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 유럽국가)은 이번 위기를 계기로 회원국들의 재정통합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는 반면, 비유로존 유럽국가들은 유로 때문에 자국 경제가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확실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로존 내에서도 낙후된 회원국에 대한 지원을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위기의 근원지인 그리스에서 물물교환이 성행하고 유로가 아닌 대안화폐까지 등장했다고 하니 달러를 뛰어넘는 지위를 꿈꿨던 유로로서는 망신이 아닐 수 없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유로존의 해체를 화두로 던지면서 "유로를 깨는 것은 채권국이나 채무국 모두에게 엄청난 위협"이라고 했다. 유럽대륙을 망령처럼 휩쓸었던 극우민족주의와 전쟁의 재발을 막는다는 의미까지 생각한다면 유로의 가치를 경제적 잣대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유로가 실패하면 유럽도 실패한다"고 했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유로와 유럽은 이제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다.

'중성자탄'이라는 별명처럼 냉혹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웰치를 한방에 날린 사람은 당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경쟁관리위원장이었던 이탈리아 출신의 마리오 몬티였다. 그가 지저분한 사생활로 추락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대신해 위기에 빠진 이탈리아를 구할 다음 지도자로 유력하다 하니 그의 등장을 보는 미국의 기분이 어떨지.

황유석 국제부 차장 aquariu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