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 일대는 '필리피노'들의 거리가 된다. 발롯(Balotㆍ곤계란) 카사바(Cassavaㆍ치즈케이크) 등 필리핀인들이 즐기는 음식과 생활 필수품들이 늘 즐비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인 필리핀인들은 인근 성당에서 미사를 본 뒤 이곳에서 요기를 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산다.
대부분 코리안 드림을 이루기 위해 땀 흘리고 있는 이주 노동자, 한국 남성과 결혼한 이주 여성들인 이들은 서로 이국 땅에서 겪는 애환을 나누고 고향 소식을 주고받으며 위안을 얻는다. 필리핀 거리는 다문화사회가 된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다.
국내에는 약 130만 명의 외국인이 살고 있다. 전체 인구의 약 2.7% 규모다. 국내 거주 외국인 증가 추세를 감안할 때 2050년에는 전체 인구의 5%인 216만 명의 외국인이 국내에 거주할 전망이라고 한다. 농촌 지역의 경우 다문화 가정이 열 가구 중 두세 가구에 이르는 상황이니 40년 뒤에는 어떤 모습일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문화사회 통합 막는 인종 편견
굳이 인구 통계 전망치를 인용하지 않아도 그때쯤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더 다국적ㆍ다문화ㆍ다인종ㆍ다민족 사회가 될 것임은 틀림없다. 그만큼 한국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글로벌 사회와 소통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개방화의 길을 걸어왔다. 1998년 이전 세계화 전략과 외환 위기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의 무조건적 수용 흐름은 외부 세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한국 사회의 대외 의존성을 심화시켜 왔다.
하지만 국민 의식이 사회 변화를 따라잡지 못함으로써 둘 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고, 그로 인해 글로벌화와 개방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 효과 못지않게 여러 부작용이 양산되고 있다.
특히 '단일 민족'으로 상징되는 순혈주의에 대한 집착, 피부색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편견은 다문화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위험천만하다. 엄밀히 말하면 피부색으로 인종을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출발이다. 프랑스 과학자 베르트랑 조르당은 저서 에서 "인간 유전자(DNA)는 서로 99.9퍼센트 동일하다. 따라서 인종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종주의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했다. 그는 "개인 차원에서 우리는 서로 다르고 어쩌면 천부적 재능처럼 질병에서도 불평등한데, 이러한 다양성은 조상 집단에 부분적으로 존재한다"며 "이러한 유전적, 문화적 다양성은 위험하기는커녕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우리를 매우 풍성하게 해줄 것"이라고도 했다. 2003년 발표된 '인간게놈프로젝트'결과를 바탕으로 인종이라는 개념과 구분 자체를 부정하는 그의 일갈은 피부색으로 인종을 가르는 이들에게 과학이 보내는 날선 비판이다.
그러나 겉은 달라 보여도 실은 다르지 않다는 과학적 사실 앞에서도 피부색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지 않는 곳이 한국 사회다. 심지어 버스에서 "냄새가 난다"고 모욕을 주거나 "에이즈 감염자일 수 있다"고 목욕탕 입장을 거부하고, 결혼 이주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거나 이주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위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 외국 언론 해외토픽란에 실려 조롱과 야유가 쏟아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할 지경이다.
의식·제도 고쳐야 건강한 사회로
1964년 이전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400년 이상 합법적으로 자행됐다. 그러나 백인에게 버스 좌석을 비켜주라는 운전사의 요구에 "싫다"고 응수한 40대 여재봉사 로자 파크스의 용기있는 한마디가 흑인 인권 운동에 불을 지펴 결국 인종차별의 벽을 무너뜨렸다.
우리 사회에서도 '한국판 로자 파크스'가 등장할 가능성은 상존하고 또 점증하고 있다. 차별금지법도 만들고 교육도 강화하되 그것을 통해 인종차별이 처벌이 수반되는 반인륜적 범죄라는 메시지를 주지시켜야 할 지경이다. 한국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 점점 강제력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 같아 못내 씁쓸하다.
황상진 부국장 겸 디지털뉴스부장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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