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로빈곤층 방치땐 복지비용 증가… 최저임금 정책 개선해야
전화상담 업무를 오래 해온 이정현(여ㆍ가명)씨는 지난해 소득이 1,700만원에 못 미쳐 올해 정부에서 근로장려금 69만원을 받았다. 비정규직으로 여러 기업에서 일해온 그는 지금 대기업에 다니고 있지만 월 임금은 150만원 정도다. 하루 9시간(점심시간 1시간 포함) 주 5일 꼬박 전화상담 업무를 하는 대가다.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고 저축은 거의 하지 못한다. 그는 "정부에서 보태주는 게 고맙기는 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차라리 월급이 올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동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2년 넘게 일하니까 고작 월 5만원 올랐다고 하더라"라며 남 이야기 하듯 한다. 그는 2년 계약직으로 계약기간 이후의 일은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이처럼 임금지급 여력이 되는 기업들까지 비정규직 저임금 근로자를 고용하고, 정부는 그 기업 편에 서서 세금으로 임금을 보전해 주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가 없는 유럽 국가들이라면 기업이 줘야 할 임금은 당연히 기업이 내게 하고, 그 다음에 복지 분야에서 책임졌을 것이다.
임금과 복지연계 연구ㆍ정책 부족
올해 정부는 51만9,000가구에 총 3,986억원의 근로장려금을 지급했다. 모두 저소득 근로자 가구다. 그러나 신청자가 혹시 불법적으로 법정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는 전혀 확인하지 않는다. 차상위 계층(소득이 최저생계비의 120~130% 이내) 지원도 각종 간헐적인 혜택을 합쳐 한해 9,000억원 가량인데,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는 근로자 비율이 해마다 높아져 12%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지만, 이 때문에 발생하는 각종 복지비용은 제대로 추산도 하지 않고 있다.
복지예산 집행기관을 탓할 수도 없다. 고용노동부가 최저임금을 어기더라도 사업주에게 시정명령 정도만 내리는 등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근로자들이 지원을 신청할 때 사업주와의 마찰을 감수하고 최저임금 지급 여부를 밝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기업들이 이윤이 늘어나도 임금을 올려주지 않은 현상(한국일보 10월 11일자 3면)이 우리나라에서만 두드러지는 데도, 최저임금 정책이나 노동제도 개선 등으로 전혀 이어지지 않고 있다. 기업이윤이 커지는데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지급하는 비율도 늘어난다면 그 이유를 확인하고 개선책을 내놓아야 하지만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10인 이하 사업장이 100만개가 넘는다"라며 "2만개 사업장 정도에 대해서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근로빈곤층 비율, 다른 나라보다 높아
우리나라 빈곤층에게 "열심히 일하지 않으니까 가난한 거다"라고 말한다면, 너구나 억울한 말이 될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분석한 결과, 일할 연령(18~65세)의 가구원이 있는 국내 상대빈곤층(중위소득 50% 이하) 중에서 실제로 취업자가 있어 일을 하고 있는 비율은 71.1%에 이르렀다. OECD 평균은 62.8%에 불과하다. 바꿔 말하면 한국이 상대적으로 일을 해도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노동연구원 이병희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저임금 근로자들의 노동시장 활동성은 굉장히 높다"며 "사실상 근로유인 정책을 펼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이런 근로빈곤층은 약 214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간혹 기초생활수급자들을 '게으른 사람들'이라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기초수급자 155만명(지난해 말 기준) 중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은 28만명에 불과하다. 이들도 10만명은 일용직으로, 1만3,000명은 상용직으로 일하고 있으며, 자영업을 하고 있는 사람도 1만5,000명 가량이고, 나머지는 자활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정규직ㆍ비정규직 임금격차가 줄고 하위직의 임금이 오른다면 빈곤문제가 더 빨리 해결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근로빈곤층 방치하면 복지비용 급증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최근 한 전문가 강의를 들었는데, 일본의 기초수급자 비율이 과거보다 두 배가 늘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을 해도 먹고 살기 힘들고, 저축도 하기 어려운 근로빈곤층들은 65세 이후 은퇴하면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이병희 연구위원은 "근로빈곤층을 방치한다면 이들이 나이 들어 기초수급자로 전락해 복지 비용이 그만큼 늘어날 것"이라며 "일을 해도 빈곤한 이유들이 대부분 노동시장에서 비롯되는 만큼 일한 만큼 처우를 받아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 임금격차 줄여야 학력 인플레도 해결된다
우리나라가 수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통계치가 있다. 바로 대학진학률이다. 가장 최근 통계인 지난해 발표된 'OECD 교육지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학진학률은 2008년, 2009년 모두 71%로 OECD 평균(56%)보다 훨씬 높다. 대학 진학률은 만 18세 인구 중 대학(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하는 학생의 비율이다.
우리나라는 1995년 41%, 2005년 54%, 2007년엔 61% 등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두 차례의 경제위기가 있었지만 대학진학률 증가 추세를 꺾진 못했다.
반면 대학까지 사실상 무상교육을 실시하는 독일의 대학진학률은 40%에 불과하다. 복지ㆍ장학제도가 잘 갖춰진 영국은 61%, 옆 나라 일본도 49%다. 유별난 교육열을 감안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은 과도한 수준이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이를 '대학 졸업장이 정규직 취업을 위한 자격증으로 전락해 나타난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규정한다. 이 소장은 그런 근거로 학력별 정규직ㆍ비정규직 비율을 든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3월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결과를 재분석 해보니 학력이 낮을수록 비정규직 종사자 비율이 높았다. 학력별 비정규직 비율은 고졸이 58.2%, 중졸 이하가 78.3%, 초졸 이하가 86.4%다.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만 나오면 10명 중 6명은 일용직, 파견근로, 기간제 등의 비정규직이 된다는 얘기다. 반면 대졸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26.9%에 불과했다.
게다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7월 현대경제연구원이 내놓은 올해 청년층의 정규직ㆍ비정규직 임금격차는 2007년 대비 무려 91.6%나 증가했다.
2007년 두 직종 간 임금(세전 월평균) 차이는 25만1,000원이었지만, 올해엔 48만1,000원으로 벌어졌다. 상대적으로 비정규직의 임금이 하락해서라는 게 연구원의 분석이다. 청년층 가운데 정규직의 임금을 100으로 봤을 때 비정규직의 임금지수는 2007년 83에서 올해는 71로 떨어졌다.
이 소장은 "비정규직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들까지 고액의 등록금을 내며 진학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며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안정적인 임금과 고용상태가 보장된다면 누가 기를 쓰고 대학에 가려고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를 늘리는 게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지름길이자 빈곤의 대물림을 막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직종 간 임금 차이가 작은 영국은 정부가 운영하는 국가공인직능자격(NVQ·National Vocational Qualification) 제도를 통해 정규ㆍ비정규직 간의 격차를 해소하고 있다.
영국에서 7년째 사는 한인 한윤화씨는 "높은 레벨의 NVQ를 따면 기술직 종사자도 정규직이나 자영업자로 활동할 수 있어 석사학위가 있는 사무직과 견줘도 부족하지 않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며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기술직 종사자의 소득수준이 한국에 비해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런던ㆍ베를린=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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