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가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솔직히 관중이 없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배신감도 자주 맛 보면 습관이 된다고 할까요."
꽉 찬 관중석은 모든 운동선수들의 바람이겠지만 지난달 말 용인종합운동장에서 만난 경기 용인시청 여자핸드볼팀 명복희(32)는 의외의 얘기를 꺼냈다. "관중이 많으면 플레이가 어색해져 텅 빈 경기장에서 우리끼리 연습하듯이 게임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한 마디 속에는 우리 핸드볼의 서글픈 현실이 배어 있었다. 이제 그는 22년 동안 애지중지해온 핸드볼을 내려놓으려 한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의 팀은 연말에 해체되기 때문이다. 용인시는 예산 절감을 이유로 올해 전체 운동부 예산을 지난해 220억원에서 90억원으로 줄였다. 핸드볼팀도 지난 6월 30일자로 해체 위기를 맞았지만 대한핸드볼협회와 경기도핸드볼협회가 하반기 팀 운영비 6억원 중 3억원을 지원하고, 시가 3억원을 추가로 마련해 겨우 연말까지 생명이 6개월 연장됐다.
그가 핸드볼을 처음 잡은 게 초등학교 3학년. 상명대 3학년 때인 1999년 처음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예선전과 8강전에서는 공격수인 래프트백으로 활약하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모두가 기억하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바로 자랑스런 '우생순'의 멤버로 아쉬움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후 두 세달 간 명복희는 영화 제목 그대로 최고의 순간을 보냈다. 여자 핸드볼 선수들끼리 "몰래카메라 찍는 것 같다"고 반신반의할 정도의 광풍이었다.
'한지볼'이라는 별명처럼 최고의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시에 쏟아진 관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상태로 돌아갔다. 대중에게 외면 받는 비인기 종목으로. "항상 그랬기에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다. 이전에도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면 '효자 종목'이란 박수갈채가 쏟아졌지만 언제나 그때뿐이었으니까." 명복희는 허탈하게 말을 이었다. 반짝 관심에 큰 대회 뒤에는 실업팀이 하나 둘 생기지만 몇 년 지나면 조용히 사라지는 일이 핸드볼계에서는 다반사라는 것이다.
그가 오스트리아 프로리그에서 뛴 1년 6개월간은 신천지였다. 그곳에는 프로리그에 1, 2, 3부가 있을 정도로 핸드볼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경기장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청소년들이 길거리에서 핸드볼을 즐겼고, 심지어 할머니들도 했다. 아파트단지에는 빠짐없이 핸드볼 골대가 세워져 있었다. 명복희는 "먹고 살기 위해 공을 잡고, 메달을 따기 위해 땀을 흘리는 우리와는 너무 다른 방식으로 핸드볼을 즐기는 그네들이 부러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우생순의 초인적인 활약에도 생활체육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명복희는 "쉽게 배워서 가볍게 즐기기 어렵고 숙련된 여럿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운동이라 생활체육으로 자리잡는 게 어려운 것 같다"고 진단했다.
팀 해체와 함께 은퇴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눈에 밟히는 것은 후배들이다. 다른 팀을 찾아야 하는데 지난해 말 정읍시청팀이 해체돼 남은 여자실업팀은 이제 8개. 모두 허리띠를 조여 매고 있는 지자체 소속이라 그쪽 역시 여건이 좋지 않다. 이적을 못한 선수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될 처지다. 대한핸드볼협회가 백방으로 용인시청팀 인수자를 찾고 있지만 전망은 어둡다. 명복희는 "여자핸드볼 선수들 중 생활이 어려운 이가 상당하다. 많지 않은 월급 받아 부모님 용돈 드리고, 생활비 하는 친구들"이라며 "너무 미안하고 답답해 후배들에게 말 건네기도 힘들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볼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은 이후 후배들이 꿈을 키워갈 수 있는 환경이 하루 빨리 갖춰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더 커져간다. 재능이 출중해도 도망가는 선후배를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핸드볼 해서 뭐해, 갈 데도 없는데"란 말을 남겼다. 명복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떠난 선후배들이 지금까지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 핸드볼은 세계 최강이었을 거다."
용인=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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