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 그 중에서도 지난 세기 가장 격렬하게 타오르며 비극적 사건에 단초를 제공했던 화약더미가 세르비아다. 1차 세계대전은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며 발발했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후 최악의 인종범죄로 기록된 코소보 사태를 저지른 것도 세르비아 정부군이었다. 그래서 세르비아라는 국가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부정적인 것 일색이다.
그러나 올해 스포츠 팬들에게 세르비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학살자로 감옥에서 사망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이 아니라 남자 테니스 세계 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다. 그가 견고하게만 보이던 라파엘 나달(스페인)-로저 페더러(스위스)의 양강 구도를 끝낸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스물 네 살 스포츠맨 한 사람이 부정적던 조국의 이미지를 단숨에 호의적으로 바꾼 것은 세르비아에서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전범국이라는 낙인에 시달려 왔던 세르비아 사람들에게 조코비치의 등장은 사막에 내린 단비와 같다.
올해 4개 메이저 대회 중 3개 대회(US오픈, 윔블던, 호주오픈)를 석권한 조코비치는 세르비아에서 절대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7월 윔블던 우승 직후 조코비치가 귀국하자 10만여명이 수도 베오그라드 거리로 몰려나와 밤새도록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보리스 타디치 대통령은 농담 삼아 "대통령을 한 번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고, 조코비치의 얼굴을 새긴 우표까지 등장했다. 어린이들은 축구 대신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은 "영웅이 필요했고 오랫동안 조코비치같은 존재를 기다려 왔던 세르비아가 승리를 만끽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독일 스위스 스페인 등 서구 선진국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세계 남자 테니스계에서 유럽 변방 출신 조코비치가 두각을 나타내자 세르비아를 보는 시선은 확 달라졌다. 세르비아의 전직 외교관이자 정치학 교수인 프레드랙 시미치는 "정치인은 정치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조코비치의 행동 하나하나가 세르비아에 긍정적 인상을 심어준다"고 말했다.
조코비치의 성공이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것은 그가 조국의 국격을 높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조코비치가 청소년 시절 세르비아를 덮친 코소보 사태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폭격 같은 정치적 격동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자리잡은 성공스토리가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1999년 NATO가 78일 동안 베오그라드를 폭격했을 때 열두 살 소년 조코비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도 높은 훈련을 계속했다. 폭격을 피해 하루는 여기로 다음날은 저기로 훈련 장소를 옮겨 다녔다. 2003년 테니스 협회의 지원이 끊기자 가족들은 조코비치에게 훈련을 계속할 수 있는 영국으로 귀화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끝까지 세르비아인으로 남았다. 국민영웅이 될 자질을 충분히 갖춘 셈이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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