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문알로에의 창업자 김정문 회장은 지난 2005년 별세했다. 이 회사제품에 대한 인기는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의 사망 이후 ‘김정문 없는 김정문알로에’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몇 년 전엔 경영악화소문도 돌았던 터라, 이 회사의 근황은 더욱 궁금했다.
김정문알로에의 현 대표는 고 김 회장의 부인 최연매씨다. 그는 인터뷰 내내 ‘가족경영’을 강조했다. “우리회사엔 정년 퇴직이란 없습니다.”
최 대표가 고 김 회장을 만난 건 1991년 무렵. 최 대표는 당시 김정문알로에의 청주지사장이었다. 김 전 회장은 첫 부인과 사별한 상태였고, 최 대표와의 나이차이는 무려 33살이나 났다. “당시 남편은 번 돈을 모두 연구개발비와 사회공헌활동에 써 자기 소유의 집도 없었어요. 하지만 그분의 정신적 위대함에 반해 결혼하게 됐지요.”
김정문알로에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폐결핵과 위궤양 간염 류머티스관절염 등 수많은 지병에 시달리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고 김 회장이 1975년 알로에로 생기를 찾은 후 국내에 널리 보급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설립했다. 그는 국내 최초로 알로에 연구소를 설립했고, 알로에 농장을 세워 한국에서 직접 재배한 생 알로에를 원료로 건강기능식품을 개발했다. 미국이나 멕시코 등에서 가루로 된 알로에를 수입해 방부제를 넣어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던 경쟁사들과 달리, 김정문알로에는 고집스럽게 무방부제 국산 알로에만을 고집했고 결국 정상의 기업이 됐다.
하지만 전문경영인 영입에 실패하면서 회사는 악화됐고, 2003년 무렵엔 부도직전에 몰리기도 했다. 게다가 김 전 회장은 고령에 지병까지 악화, 경영에 전력투구할 수 없는 상태였다. 43세의 최 대표가 직접 경영에 나선 건 이 때부터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꾸러 다녔는지 모르겠어요. 직원들 월급도 꽤 오랜 기간 동안 주지 못했지요.”
그는 소통 밖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회사를 지키고 있는 임직원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기 위해 부회장실 문을 열어두었고, 언제나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상품구조조정도 했다. 재고 회전율이 7년이나 되는 제품이 있을 정도로 종류가 많았던 것을 과감히 정리, 절반 정도의 제품만 남겼다. 오로지 품질에만 신경 썼던 김 전 회장과 달리 제품 패키지 디자인 등에도 여성의 감각을 발휘해 개선했다. 회사는 2004년부터 흑자로 전환, 급한 불을 끄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2005년 김 전 회장이 사망하면서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김정문 없는 김정문알로에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커졌고, 심지어 “회사를 팔라”는 제의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최 대표는 이번에도 임직원과의 소통, 특유의 가족경영을 통해 위기를 넘겼다. 그는 “자연주의 인간존중 사회기여, 이 세가지 경영이념은 그냥 구호가 아니고 생전에 남편이 철저하게 실천했던 원칙이었는데 2년 동안 나를 지켜본 회사직원들이 이 이념을 계속 실천해 나갈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최 대표의 자택에는 지금도 김 전 회장이 쓴 ‘평등 없는 정의란 없다’는 글귀가 걸려 있다. 그는 “남편은 부의 양극화를 매우 싫어했고 ‘한두 명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한두 명을 구제하는 것이지만 사회구조를 바꾸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민주화운동, 환경운동, 시민운동 등을 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 뜻을 이어받아 최 대표 역시 ‘만만만 생명운동’(만명의 후원자가 만원으로 만명의 생명을 살리자는 운동), ‘산수유 제도’(지병이 있는 저소득 가정에 알로에 제품을 무상 지원하는 제도)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해 오고 있다.
최 대표는 지금도 매년 연말이면 전 직원을 집으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위기 때마다 자신을 믿어주고 힘을 실어준 임직원들에 대한 작은 고마움의 표시라고 한다.
“임직원이 원할 때까지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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