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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모든 악마들은 여기에 있도다"

입력
2011.10.1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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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년 전인 1831년, 교도소 시찰을 목적으로 미국을 방문한 26세의 프랑스 법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전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목도한 이 신생국의 새로운 사회구조가 머잖아 늙고 병든 대륙 유럽에서도 필연적으로 실현되리라 기대하며 라는 책을 썼다. 토크빌이 목격한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한 마디로 평등이었다. 그는 미국의 사회 구성원들이 다른 구성원들과 적어도 겉으로는 완전히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것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세습적 신분, 위계구조가 없는 미국 사회는 노르망디의 귀족 출신 청년 토크빌에게는 경이 그 자체였다.

그러나 토크빌의 예리한 눈은 미국인이 누리는 평등이 자칫하면 '고립적 평등'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사람들 간의 차이를 낳는 모든 차별이 사라진 듯 보였지만,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돈에 의한 차이'였다. 돈에 따른 차이 말고는 모든 것이 평등한, 미국적인 평등을 움직이는 원리는 자본주의적인 것임을 토크빌은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표면적으로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고립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평등에 분노한 '1%대 99%'

토크빌이 예견했던 대로 미국사회의 평등 가치는 유럽은 물론 전 세계로, 실제로는 평등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평등이라는 가치를 표면적으로는 그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 형태로 퍼져나갔지만, 지금 그것은 180년래 가장 거센 위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지난달 17일 시작돼 한 달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월가 점령 시위가 그것이다. '1% 대 99%'라는 시위대의 구호는 그들이 평등이라는 가치가 허울에 불과하다고 여긴다는 것을 너무도 간명하게 보여준다. 월스트리트의 실상을 폭로한 책 제목 는 셰익스피어의 멋들어진 문장을 빌어 탐욕스런 월스트리트를 악마에 비유하며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에 썼다는 원문은 "지옥은 텅 비었고, 모든 악마들은 여기에 있도다"라는 것이다. 반 월가 시위가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시발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실감시켜 주는 비유다.

오늘 점령 시위가 한국에서도 벌어진다. 여의도 금융가에서는 한국 금융자본의 탐욕을 규탄하고 잘못된 금융정책의 책임 규명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예정돼 있고, 이어 서울광장 등지에서는 금융뿐만 아니라 반값등록금, 무상보육, 빈곤철폐 등 한국사회의 현안에 목소리를 내는 '1%에 맞선 99%의 행동' 집회가 열린다. 일각에서는 시위의 폭력화를 우려하면서, 한국에서의 시위를 '짝퉁 시위'로 격하시키고 있지만 그리 볼 일은 아니다. 반 월가 시위는 이미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고, 15일에만 70여개 국 수백 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열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국에서 시위가 시작된 지 한 달이나 지나 뒤늦게 한국에서 짝퉁 퍼포먼스가 벌어진다고 비판하는 것은, 1980년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을 비난하던 무리가 '서구에서는 이미 한물간 1960년대 좌파운동의 모방'이라고 욕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세계는 그만큼 좁아지고 빨라졌다. 반 월가 시위대의 요구사항을 보면 한국과 그 사정이 얼마나 흡사한지 놀랄 정도다. 당초 실업자나 노숙자들의 개인적 좌절과 불만에서 나온 단발성 행동 정도로 여겨졌던 시위는 점차 요구 내용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시위대가 지난 9일 투표를 거쳐 공개적으로 내건 12가지 요구 사항이 있다. 그 두번째 항목은 부자 감세 철폐, 다섯번째는 부자 증세안(버핏 법안) 통과, 여덟번째는 금융감독기관 종사자의 이전 직장 재취업 금지, 아홉번째는 기업의 이익이 곧 국민의 이익이라는 논리 거부, 열두번째는 학자금 대출에 쪼들리는 학생들 구제이다. 다른 요구사항도 마찬가지, 그대로 한국의 현 상황에 대입시켜도 한 치 어긋남이 없는 것들이다.

역사의 시각에서 지켜봐야

토크빌이 돈에 의한 불평등을 예견한 후 180년 사이 세계를 점령해버린 금융자본, 그것을 규제하지 못하는 정부와 국가, 즉 한계에 달한 자본주의적 평등의 가치에 대한 의문을 반 월가 시위는 던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좀 지나서 보면, 1960년대 학생과 노동자들의 사회변혁운동이 혁명으로 명명됐듯이 이번 시위 또한 역사의 흐름을 바꾼 혁명적인 행동으로 기록될지 모른다.

하종오 편집국 부국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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