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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복지의 길을 묻다] <3부> 4. 균형 잃은 노사, 실종된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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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복지의 길을 묻다] <3부> 4. 균형 잃은 노사, 실종된 제도

입력
2011.10.1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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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으론 "비정규직 차별금지"… 현실은 차별시정 요구하면 '해고'

"차라리 좀더 일찍 장사를 시작하는 편이 나았을 것 같아요."

9년 간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두달 전 5평 규모의 식품가게를 시작한 김주원(29ㆍ가명)씨. 김씨는 직장생활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최근까지 그는 5,6개의 회사를 옮겨 다녔다. 하지만 정규직으로 일한 적은 한 차례도 없다. 파견회사에 소속돼 대형할인점이나 백화점 등에서 제과ㆍ식료품 전시와 판촉업무를 담당했지만 청소 같은 잡무는 늘 그의 몫이었다. 이틀에 한번 꼴인 할인행사 때는 1,2시간씩 일찍 나오거나 야근을 했지만 법으로 보장된 야근수당을 받아본 적이 없다. 고용보험과 국민연금 혜택도 전혀 받지 못했다. 하루 9시간, 연월차 없이 주 6일 일하며 김씨가 받은 월급은 정규직의 50~70%에 불과한 100만~120만원. 김씨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인 희생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직장생활을 그만뒀다"고 털어놓았다.

선거철을 맞아 복지국가 논의가 한창이지만 김씨 같은 이들에게는 먼 나라 얘기다. 분배의 과실에서 소외된 비정규직 숫자는 줄지 않고 차별개선은 더디기만 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2009)에 따르면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21.3%로 26개 OECD 회원국중 4위다. 비자발적으로 비정규직을 선택한 비율은 62%로 1위였다. 2001년 정규직의 52.6%였던 비정규직의 임금은 지난해 46.2%로 더 떨어졌다. 주 48시간 이상 일하는 장시간 노동비율도 비정규직(27.6%)이 정규직(15.4%)보다 2배 가까이 높았다.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일자리가 없어 마지못해 비정규직을 택하고, 정규직보다 더 오래 일하면서 임금은 절반밖에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법 있어도 무용지물

법 규정만 보면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직접고용된 근로자와 동종유사업무를 하는 근로자를 차별하면 안 된다'는 파견법 규정을 비롯해 현행법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원칙에 따라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무법천지다.

노동계 최대현안인 사내하청(하도급)문제가 단적인 예다. 기계ㆍ자동차ㆍ조선 등 대기업 50% 이상이 사내하청을 쓰고 있는데 대기업은 직접고용한 정규직 노동자와 똑같은 일을 시키면서도 "우리 직원이 아니다"고 고집한다. 법원이 잇따라 직접고용 판결을 내렸지만 기업들은 도리어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징계하거나 해고했다.

원청업체인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다 지난 3월 해고된 사내하청노동자 김호선(52)씨는"1주일에 두번씩 주말에도 야근을 해가며 회사를 위해 일했지만 돌아온 것은 정규직 절반의 임금과 해고"라며 "현대차가 1만명이 넘는 사내하청노동자를 고용해 부당하게 가져가는 이익이 한해 5,000억원은 될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기업은 막무가내로 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정부에게선 의지를 찾아보기 어렵다.

임금이나 근로조건의 불이익을 받으면 차별시정을 요구할 수 있지만 이 제도도 허점투성이다. 차별을 겪은 노동자만 노동위원회에 차별시정을 내게 돼 있어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2009년 차별시정신청을 냈다가 농협에서 해고당한 박형철(35ㆍ가명)씨는 "조사관들이 회사측 40~50명이 둘러싼 사무실에 나를 혼자 앉히더니 '차별신청 하셨네요?'라고 따지듯 묻더라"며 "이런 제도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차별시정신청사건 105건 중 차별이 인정된 사례는 24건(22.9%). 노동계는 신청자가 노출되지 않도록 노동자대표나 노조가 신청을 할 수 있도록 제도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단협 적용 확대해야

전문가들은 산별교섭을 강화하고 낮은 비정규직 노조조직률(약 2%)을 높이면 비정규직 차별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은 "OECD 등 국제기구는 노사교섭을 초기업 단위로 할수록 임금불평등이 해소된다고 결론짓고 있다"며 "노조가입과 상관없이 단체협약을 적용받도록 효력확장제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행법은한 지역 동종 근로자 3분의 2 이상이 단협 적용을 받을 때에만 노동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3분의 1에도 적용하도록 돼있어 지나치게 문턱이 높다. 국제노동기구(ILO)는 협약 당사자인 노사단체 중 하나 이상이 효력확장을 요구하면 협약의 적용을 확대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정규직 노조가 함께 압력을 가할 필요도 절실하다. 1990년대 초 호황기에는 기업이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임금인상요구를 수용할 여유가 있었지만, 외환위기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고 정규직 노조는 자신의 이익지키기에만 골몰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신은종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실질적인 산별교섭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배려하는 연대가 있어야 정규직, 비정규직간의 격차가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 선진국 비정규직 권익신장 뒤엔 '시민의 힘'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자'고 하면 동의할 사람은 많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잘 조직된 노조조차 나서는 일이 드물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시민들이 기업에 압력을 가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익을 되찾은 사례가 있다.

2002년 파리 북부 생드니지역의 맥도날드 비정규직 점원 5명이 노조에 가입하려 하자 사측은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씌워 이들을 해고했다. 이들의 억울한 사정이 알려진 뒤 나선 것은 전혀 관련이 없는 시민연대결사(solidarity colletive)였다. 이 단체는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개선에 관심이 많지만 관료화된 노조운동에는 회의적인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 모임이다. 시민연대결사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파리 곳곳의 맥도날드 앞에서 피켓시위를 벌이고 점원들의 파업을 유도했다. 후원금을 모금해 파업노동자를 지원했다. 뒤늦게 프랑스 노조의 지원이 뒤따랐고 파업은 맥도날드가 5명의 해고 노동자를 재고용할 때까지 115일이나 이어졌다.

자신들의 노무시스템은 완벽하다고 자신하던 프랑스 맥도날드가 처음 잘못을 시인한 사건이었다. 그 영향으로 2003년 이후 맥도날드 등 패스트푸드, 호텔 등 서비스 노동자들의 잇단 파업이 이어졌다.

3,300여개 매장을 가진 독일 유통업체 리들사는 사적인 공간까지 카메라와 도청장치를 설치해 노동자들을 감시하다가 2004년부터 4년간 고발캠페인에 시달렸다. 서비스산업노조 베르디가 나서서 노동자들이 인터넷에 피해사례를 올리도록 한 '익명의 진술서' 운동을 벌였다. 울리히 달리보어 베르디 소매업부문 의장은 "리들사의 인권침해와 노동법위반이 알려지자 언론이 증거를 찾아 보도했고, 가치지향적 소비를 하는 소비자에게 영향을 미쳐 매출에 타격을 주었다"고 말했다. 리들사는 즉시 카메라와 도청장치를 없앴고 최근에는 대대적인 임금인상안도 발표했다.

박명준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 연구원은 "독일에서 기업이 노동자를 무시하지 못하는 데에는 소비자들이 친사회적인 기업인지를 따져가며 구매하는 성향도 작용한다"며 "사측이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같은 사례를 독일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이유"라고 설명했다.

파리=이왕구기자 fab4@hk.co.kr

베를린=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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