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도해 바람에 살랑살랑… 은빛 가을을 튕겨내다
은빛 억새를 보러 천관산 오르는 길, 산이 부산스럽다. 적(赤), 황(黃), 갈(褐)의 빛들이 숲을 덮치기 직전, 에부수수한 나무들이 끝물 녹색을 잎맥에서 서둘러 밀어내고 있다. 해는 쑥 짧아졌지만 볕이 따갑다. 남도의 가을빛은 아직 푸슬푸슬했다. 챙겨간 감상(感傷), 말하자면 이런 류의 인스턴트 객수도 그래선지 포장을 뜯기가 난감했다. 마종기 시 '북해의 억새'(ㆍ문학과지성사ㆍ2010) 첫머리다.
"정확히는 해안이 아니었어./북해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능선,/그 언덕에 핀 지천의 은빛 억새꽃이/며칠째 메아리의 날개를 내게 팔았지./저녁 바람을 만나는 억새의 황홀을 정말 아니?"
천관산(天冠山)이라는 산 이름은 등성마루에 비죽비죽 솟은 봉우리가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 같다고 해서 붙었다. 정상인 연대봉의 해발고도가 723m로 그다지 높은 축엔 못 든다. 하지만 맑은 날엔 다도해 건너 한라산이 보일 만큼 이 지역에선 우뚝하다. 40만평에 이르는 넓은 산정에는 나무가 거의 없는데 억새가 민둥산의 표면을 가득 덮고 있다. 가을과 겨울, 바닷바람이 억새밭에 가르마를 탈 때면 햇빛이 부서져 은빛 가루가 된다.
등산 코스는 북쪽 관산읍 장천재에서 출발하는 길과 남쪽 대덕읍 탑산사에서 출발하는 길, 크게 둘로 나뉜다. 어느 쪽을 택하든 연대봉까지 1시간 3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다. 하지만 가을 천관산 등산은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억새밭을 보러 가는 길. 넉넉히 시간을 잡고 연대봉에서 환희대까지 1㎞ 가량 이어지는 억새의 물결에 푹 젖는 게 이 계절 천관산에서 누리는 호사다. 어른 키만한 억새 줄기 속으로 들어가면 아기바위, 사자바위, 종봉, 관음봉, 돛대봉 등등이 억새 바다 위에 섬처럼 솟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차를 가져 간다면 올랐던 길을 되짚어 내려와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등산과 하산 코스를 다르게 잡는 게 좋다. 천관산 자락에는 실학자 위백규(1727~1798) 등 장흥 위씨의 어른들을 모신 제각인 장천재, 고려 인종왕비 공예태후 등을 배향하고 있는 정안사, 대덕읍민들이 조성한 600여기의 자연석 돌탑이 장관인 탑산사 등이 흩어져 있다. 탑산사 아래 2002년 문을 연 천관산문학공원도 빠뜨리고 가기 아쉬운 곳. 한승원, 이청준, 송기숙 등 장흥 출신 문인을 비롯해 유명 문인 39명의 작품과 육필 원고 등이 전시돼 있다.
문학공원에 있는 천관산에 대한 한승원의 글이다. "이 관내 모든 학교의 교가 속에/장엄한 산이 우뚝 솟아 있듯이/내 육체와 영혼 속에 이 산이 우뚝 솟아 있다." 나고 자란 고장에 대한 작가의 돌올한 긍지. 하지만 저물녘 잿빛 억새에 덮인 천관산 공기는 왠지 무지근하게 느껴졌다. 하산길에 그 이유의 한 구석을 본 듯도 하다.
장흥의 들판, 억새밭의 흰 빛깔보다 논의 누런 빛깔이 훨씬 윤기가 흘렀다. 황금이라는 색의 수식어를 쓰는 것은, 그러나 이 시대 경작의 풍경 앞에선 무엄한 짓이 되기 십상이다. "쌀농사 죽이는 정부에는 한 톨도 팔지 맙시다"라고 쓴 추곡수매 거부 플래카드가 장흥의 들판 곳곳에 펄럭이고 있었다. 결국 이 심란한 풍경에도 객쩍은 여행객의 감상을 붙이고 만다. 다시 '북해의 억새', 마지막 부분이다.
"변하지 않는 시야에 서 있는 귀향의 끝,/평범하게 말 없이 살자고 약속했던 그대여,/끝없이 추락까지 그리워하며 잠들던 그대여,/나도 안다, 우리는 아직 여행을 끝내지 않았다./ 내가 찾던 평생의 길고 수척한 행복을 우연히/넓게 퍼진 수억의 낙화 속에서 찾았을 뿐이다."
장흥=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여행수첩/ 장흥 천관산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광주나 나주를 거쳐 장흥에 닿은 뒤, 23번 국도를 타고 강진 방향으로 가다 보면 천관산이 나온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목포까지 온 다음 2번 국도를 타고 보성 방향으로 가다 23번 국도를 갈아탄다. 장흥군청 문화관광과 (061)860-0224.
●국립 천관산자연휴양림이 천관산 북서쪽 자락에 있다. 숙박시설과 무료 숲 해설, 자연 체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문의 (061)867-6974.
●장흥읍내 토요풍물시장에서는 키조개 새조개 쇠고기를 함께 구워먹는 삼합구이 등 별미를 맛볼 수 있다. 장흥군 특산품 판매장 (061)860-0741.
■ 억새 명소들
울긋불긋한 단풍이 가을의 외향적 면모라면 단색의 억새는 가을의 내면이다. 단풍이 모두 지고 난 다음에도 은빛으로 넘실대며 겨울을 맞는다. 바람이 시린 가을날, 등뼈를 드러낸 민둥산으로 가면 은빛의 억새 물결을 만날 수 있다.
밀양 사자평 고원
140만평의 남한에서 가장 넓은 억새 군락이 제약산(1,189m) 수미봉부터 사자봉 일대 해발 800m 고원에 펼쳐져 있다. 밀양 표충사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길과 쌍폭포를 지나 고사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표충사에서 폭포로 이어지는 길엔 단풍도 곱게 든다. 억새밭 너머 영남 알프스의 산맥이 병풍처럼 버티고 있다. 문의 밀양시 문화체육과 (055)359-5646.
정선 민둥산
산나물을 뜯느라 해마다 산불을 지펴 민머리 산이 된 20만평 능선에 억새가 빽빽이 자란다.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해 뚫고 지나가기 힘들다. 등산 코스는 태백선 민둥산역(증산역)에서 증산초등학교, 민둥산 정상(1,118m)을 지나 지억산(1,157m) 거쳐 정선군 동면 화암약수까지 약 15㎞ 이어진다. 문의 정선군 관광문화과 (033)560-2361.
창녕 화왕산
757m의 화왕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움푹 들어선 화왕산성이 가을이면 억새의 호수가 된다. 6만평 가득 억새가 자라는데 특히 안개 낀 새벽이면 초원이 우윳빛 욕조로 변한다. 화왕산으로 올라 관룡산으로 하산하려면 창녕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창녕여고가 시발점이 되고, 반대의 경우는 옥천리 관룡사에서 출발하면 된다. 문의 창녕군청 산림과 (055)530-1661.
서울 월드컵공원
난지도 제2매립지에 들어선 월드컵공원 하늘공원도 억새군락을 볼 수 있는 명소 가운데 하나다. 한강과 서울의 빌딩숲, 멀리 북한산을 배경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은빛 물결이 색다른 감흥을 준다. 14일부터 23일까지 '제10회 억새 축제'가 열린다. 공원 홈페이지(worldcup.seoul.go.kr) 참조.
유상호기자 shy@hk.co.kr
■ 슬로시티 장흥. 편백숲·정자의 풍류… 시간도 하룻밤 묵어가는 곳
장흥은 공장 굴뚝을 세우고 길을 넓히는 게 내 고장을 번듯하게 만드는 길이라 여기는 세태에 둔했던 곳 가운데 하나다. 대신 걸출한 문인을 많이 길러냈다. 두 사실 사이에 역의 비례가 있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장흥 땅에 오면 느긋한 표정을 사람과 자연의 얼굴에서 어렵잖게 읽을 수 있다. 허겁지겁 살다가 불쑥 찾아가도 늘 편안히 맞아주는 고향집 같은 곳. 장흥에서 나고 자란 이청준(1939~2008)의 단편 '눈길'(1977)에서 노모는 아들을 이렇게 타이른다. "넌 항상 한동자로만 왔다가 선걸음에 새벽길을 나서곤 하더라마는… 이번에는 하룻밤이나 차분히 좀 쉬어 가도록 하거라."
▦느리게 사는 곳, 장흥
장흥은 국제슬로시티연맹이 지정한 국내 10곳의 슬로시티 가운데 하나다. 유치면 봉덕 마을 등 33개 마을, 장평면 연동 등 6개 마을이 그곳이다. 유기농 순환농법을 실시하는 곳이라 볏짚 태우는 매캐한 연기, 거름으로 치는 인분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고찰 보림사가 있는 봉덕 마을은 서리태로 청국장을 만드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수인산성 입구의 수덕 마을에서는 전통 발효차인 청태전(돈차)과 무농약 매실로 만든 장아찌를 맛볼 수 있다. 장평면 우산리와 병동리 일대에서는 지렁이 분변토를 이용한 농법을 가르치는 지렁이생태학교가 있다.
숭어, 돔, 낙지 등을 맨손으로 잡는 전통 고기잡이 개매기, 생약초와 야생화를 이용한 유기농, 장수풍뎅이 기르기도 해볼 수 있다. 장흥슬로시티 방문자센터 (061)864-0041.
▦강가에 걸린 팔작지붕
알려지지 않아 찾는 이가 거의 없지만, 그래서 떡하니 동네 공용 냉장고가 설치돼 있는 곳도 있지만, 장흥에는 예스러운 정자가 여섯 군데 있다. 조용히 책을 읽거나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들이다. 대부분 종중 재산이니 이용하기 전 양해를 구하는 게 좋다.
사인정은 세종 때 전라감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낸 김필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지은 정자다. 어린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하늘이 열린 곳에 정자 터를 잡았다. 훗날 백범 김구가 숨어 다니던 시절 썼다는 글씨도 바위에 새겨져 있다. 동백정은 반대로 세조 때 좌찬성을 지낸 김린이 은퇴한 뒤 세운 정자. 강굽이를 굽어보는 곳에 동백과 소나무로 울을 두른 조경이 빼어나다.
▦영화가 사랑한 바닷가
염습부터 하관까지 전통 장례 과정, 그리고 상가에 모인 가족의 애증을 한 판 걸진 잔치로 그려낸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1996)의 무대는 장흥 남포항이다. 원작자 이청준의 고향이 바로 이곳. 특별히 예쁠 것 없는 작은 포구다. 그래서 갯사람의 질박한 인심이 오롯이 남아 있는지도 모를 일. 득량도가 손에 잡힐 듯 떠 있다.
서울에서 나침반의 파란 바늘이 가리키는 땅끝인 정남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천년학'(2007)의 배경인 선학동 마을이 있다. 영화에서 주막으로 쓰려고 만든 세트장이 지난해부터 정말 주막으로 영업 중이다.
▦코끝을 스치는 편백향
장흥읍 억불산 자락에 있는 편백숲우드랜드는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수고로움 없이 피톤치드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곳이다. 20만평 규모의 숲에 40년생 아름드리 편백이 빽빽이 자라고 있다. 산책로는 톱밥을 깔거나 나무 데크를 설치해 노약자도 쉽게 걸을 수 있게 만들었다. 쌀겨 효소와 톱밥을 이용해 열을 가하지 않고도 온열욕을 즐길 수 있는 편백톱밥 찜질방, 국내산 천일염을 이용한 편백소금집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숲과 나무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목재문화체험관, 편백으로 만든 가구와 목제품을 전시ㆍ판매하는 목공예센터도 산책로 중간에 있다. 반나절 산책 코스로도 좋지만 황토한옥과 통나무집에서 하룻밤 묵으며 숲의 기운을 제대로 느껴보는 것도 좋은 체험이다. (061)864-0063.
장흥=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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