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설문동의 봉안시설 청아공원에 들어선 마임순(64) 고양금정굴유족회 회장은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했다. 가슴 속에서는 '그 동안 헛고생 한 것은 아니었다'는 회한이 밀려왔다. 서울대 의과대학 창고에 16년간 보관됐던 고양 금정굴 사건 희생자들의 유해는 이날 청아공원에 안치됐다. 마 회장은 "이제서야 원점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16년 전인 1995년 가을. 당시 유족들이 100만원씩 각출한 발굴비와 시민단체가 모금한 성금으로 일산서구 탄현동 황룡산 자락의 금정굴에서 유해 발굴이 시작됐다. 발굴 작업은 예상과 달리 수월했다. 주민들은 희생자들이 묻힌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갱이'란 낙인이 두려워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뒤 45년 동안 아무도 근처에 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굴 입구부터 17m를 파 내려가는 동안 오른쪽 대퇴골 153개와 두개골 73개 등이 확인됐다. 사회적 관심을 끌었지만 유해 보관이 문제였다. 발굴 현장 옆에 쭉 늘어놓아 훼손은 불을 보듯 뻔했다. 마 회장은 임시 보관할 장소를 수소문했지만 응해주는 곳이 없었다. 그때 이윤성 서울대 의대 교수를 만났다. 현장을 둘러본 이 교수는 침울한 표정으로 한 마디도 없이 돌아갔다. 이튿날 마 회장에게 이 교수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 잠도 못 잤습니다. 어서 모시고 오십시오."
그렇게 시작된 임시 보관은 16년이나 계속됐다. 유족과 시민단체가 요구한 안식처와 추모공원 조성은 물론, 진상규명 역시 보수단체 등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유해도 고양시로 귀향하지 못했다. 군사정권은 막을 내렸지만 반공 이데올로기의 위력이 여전한 시절이었다.
유해를 안치하고 이달 초 금정굴에서 만난 마 회장은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며 "서울대로 옮길 때는 이렇게 오래 걸릴 줄 꿈에도 몰랐다"고 입을 열었다.
마 회장이 금정굴 사건에 뛰어든 것은 우연이었다. 1993년 잃어버린 조상 땅을 찾기 위해 수소문하다 금정굴의 실체를 알게 됐다. 시댁 식구 중 한 명이 월북해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를 포함해 남자 9명이 금정굴에서 학살당했고, 재산도 모두 빼앗긴 것이었다. 빨갱이란 한 마디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던 시대라 학살자 유족들은 연좌제에 묶여 공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기업에서도 외면했고, 출국이 금지돼 이민도 불가능했다. 유족들에게 금정굴은 입에 담아서는 안될 금기였다.
18년간 진상 규명에 매달려온 마 회장에게도 금정굴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귓가에서는 "저 여자 빨갱이래"라는 비아냥이 떠나지 않았고, 희생자 유족까지 "왜 나서서 일을 만드느냐"고 말릴 정도였다.
과격한 이들은 유족회 사무실 자물쇠를 수 차례 부수고, 외벽에 붙여 놓은 사진의 얼굴을 짓이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마 회장은 "그때는 젊어서 패기에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었지만 지금이라면 못할 것 같다"며 "금정굴 일대에 추모공원을 조성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고 싶다"고 말했다.
● 금정굴 사건은
고양 금정굴 사건은 1950년 9ㆍ28 서울 수복 이후 경찰과 치안대 등이 북한군 부역 혐의자나 가족 등 최소 1,000명을 학살한 사건.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6월 이 사건을 경찰의 지휘하에 불법적으로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로 규정했다. 현재 희생자 30여 명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진행 중이다.
글·사진 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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