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이 A형이라서 꼼꼼하다거나 소심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나치스 치하 독일에서 본격적 연구가 시작돼 골상학과 마찬가지로 끝내 과학적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소멸한 ‘혈액형 인간학’이 남긴 흔적이다. 과학적 근거와는 무관하게 지금까지도 일종의 종교적 신념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구세대보다는 과학적일 젊은 세대들이 의외로 ‘혈액형 신화’에 매달리는 게 좋은 예다. 혈액형과 특정 병원체에 대한 저항력을 연관시키려는 등의 일부 과학적 논의를 뺀 대개의 혈액형 이야기는 심심풀이라면 몰라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기는 어렵다.
■반면 사람, 특히 남성을 ‘문과형’과 ‘이과형’으로 나누어 성격과 능력,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일반적 예상치를 설정하려는 시각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흔히 ‘문과형’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든다.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에 밝아 할 얘기가 많고, 같은 소양을 갖추었어도 상대방 눈 높이에 맞추어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능력이 ‘이과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소통과 설득의 능력이자, 기민한 변화 적응 능력이다. 전통적 활동 무대인 정치ㆍ경영ㆍ금융 분야뿐만 아니라 첨단산업 분야에서도 각광을 받는 자질이다.
■인문학적 소양이나 적응 능력과 함께 가장 자주 거론되는 문과형의 특징은 ‘종합력’이다. 과학ㆍ기술 분야에 어울리는 이과형이 잘게 쪼개어 깊이 들어가는 분석력이 뛰어나다면, 문과형은 조각난 정보를 엮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형태로서 드러내는 데 능하다. 엄밀한 과학적 지식에 약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전술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사회적 활용도는 크다. 시대의 총아인 정보기술(IT)ㆍ생명기술(BT) 분야에서도 최종적 과실(果實)은 문과형이 차지하는 예가 숱하다. 과학기술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력이 ‘종합력’의 불가결한 요소의 하나임은 물론이다.
■얼마 전 세상을 뜬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문과형이다. 애플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위즈니액과 비교하면 그런 성격이 확연하다. 기술보다는 시장에 민감했고, 혁명적 기술의 개발보다는 기존 기술을 통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는 데 능했다. 애플 복귀 이후 내놓은 아이맥과 아이포드, 아이폰, 아이패드를 관통한 ‘디자인 혁명’도 그랬다. 이과 출신이 기죽을 일은 없다. 문과 출신이라고 다 ‘문과형’이 아니듯, 이과 출신이라고 다 ‘이과형’이 아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쏠린 기대도 ‘문과형’ 성장 가능성과 맞닿아 있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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