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기통 1,323cc 엔진에 전진 3단 후진 1단의 트랜스미션을 얹은 최고속도 시속 80km의 '시발' 자동차가 1955년 10월 12일 최초의 국산 자동차로 등록됐다. 잘못 발음하면 오해를 살 수 있는 시발 자동차는 처음 시(始), 떠날 발(發)을 따 첫 출발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참상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던 55년, 거리에는 고장 나고 부서진 자동차들이 줄을 이었다. 전쟁 후 우리나라는 미군 지프의 부품을 두들겨 맞춰 다시 굴러가게 하는 재생공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시발을 만든 국제차량공업도 그 중 하나였다.
46년 을지로에 국제공업사를 세운 최무성, 혜성, 순성 3형제는 폐차된 미군 지프의 부품을 모아 재생 차를 만들다가 우리 손으로 직접 차를 만들어보자고 의기 투합했다. 수 차례의 시행 착오 끝에 4기통 엔진 제작에 성공한 이들은 미군 지프를 닮은 네모난 박스형 몸체에 라디에이터 그릴을 V자로 만드는 등 나름대로 멋을 부린 시발 1호를 선보였다. 55년 출시 당시 가격은 8만 환이었고 한 대를 생산하는 데 4개월 여의 시간이 소요됐다.
처음에 별 인기를 끌지 못하던 시발은 같은 해 10월 3일 경복궁에서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국산품으로 선정되며 한껏 주가를 올리게 된다. 특히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아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택시영업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50년 대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택시가 바로 이 시발 택시인 것이다. 시발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프리미엄이 붙고 투기 붐까지 조성됐는데 부유층 부녀자들 사이에 차량 구입을 위한 '시발계'까지 등장할 정도였다니 인기를 가히 짐작할 만 하다.
승승장구하던 시발도 휘발유 부족 사태와 더불어 5ㆍ16 군사정권 이후 새나라자동차가 설립되며 내리막 길을 걷게 됐다. 닛산 블루버드를 도입해 만든 예쁘장한 새나라가 택시 수요를 흡수하면서 시발은 결국 62년 2,000 여대의 생산을 마지막으로 단종되고 말았다
아쉽게도 시발 자동차의 원형은 남아있지 않다. 삼성교통박물관 등에 복원된 차만 전시돼 있을 뿐이다.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든 현대의 '포니'가 있어 시발이 과연 최초의 국산 자동차이냐 하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우리도 자동차를 만들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준 것은 분명하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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