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돌연 시대의 총아로 전면에 재등장했다. 말할 것도 없이 스티브 잡스 덕이다. "소크라테스와의 한 끼 식사와 애플의 모든 기술을 바꿀 수 있다"는 그의 기막힌 한마디는 오랫동안 뒷방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온 인문학을 단숨에 무대 중앙으로 올려놓았다. 생전에 그는 "대학 때 가장 가치 있던 일은 고전 100권 읽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라고 회고하는 등 수시로 인문학적 가치에 대한 확신을 표명했다. "IT 혁신의 궁극적 지향점은 결국 인간"이라는 그의 말에 전 세계 CEO들은 먼지 쌓인 서가의 책들을 다시 빼 들었다.
■ 잡스 뿐이 아니다. 그와 함께 현대 IT 세상을 창조해 낸 빌 게이츠 역시 "오늘의 나를 만든 건 어릴 적 동네의 공공도서관"이라고 말할 정도의 대단한 독서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6월 소개된 그의 올 여름 독서목록 10권에는 고전 을 비롯한 문학, 사상, 물리학 서적이 두루 포함됐다. 페이스북을 창시한 마크 주커버그도 "내 취미는 그리스, 라틴 고전을 원전으로 읽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고, 소프트뱅크의 손정의도 을 수천 번 읽는 등 광범위한 인문고전 읽기를 통해 늘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 인문학은 결국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지금은 문(文)ㆍ사(史)ㆍ철(哲)을 포괄하는 정도의 의미로 좁게 쓰이지만 인문학(humanities)이라는 용어 자체가 라틴어의 'humanitas(인간다움)'에서 나온 말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삶의 경험에 대한 이해와 그 의미 탐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스스로의 성숙한 삶을 형성하게끔 해주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과 주변세계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인간성을 고양하기 위한 실천적 공부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래 인문학은 현실적 효용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 잡스의 죽음으로 인문학에 대해 부쩍 관심이 높아진 것은 반갑지만 한편으로 은근히 걱정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칫 서점마다 즐비하게 깔려 있는, 출세나 이재에 도움되는 실용서 쯤으로 인문학이 오인되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드는 것이다. 당장 쓸모 있는 아이디어와 답을 구하려는 이들에게 인문학은 별 소용이 없다. 작가 김훈 식으로 말하자면 '인문학 속에는 길이 없다'. 다만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고를 통해 멀지만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게 실용학문과 다른 인문학의 효용이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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