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고등학교에서 직업진로 관련 특강을 하게 됐다. PD라는 직업에 대한 아이들의 궁금증에 답해주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였지만 요즘 아이들이 도대체 PD라는 직업에 대해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가 나는 궁금하기도 했다. 마침내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한 아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돈은 얼마나 벌어요?"
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짐짓 못들은 척 하며 시간을 벌었다.
"어..뭐라고요?"
아이는 짜증스럽다는 듯 다시 물었다.
"월급이 얼마나 되냐고요.."
아이가 특히 힘주어 말한 '월급'이란 단어가 새삼스럽게 가슴 깊이 박혔다. 그렇구나. 내가 월급쟁이였지. 월급날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모든 종류의 결제일이 몰려있는 월급쟁이. 월급이 한 달만 안 나와도 당장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해야 하는 삶의 구조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었지. 그런데 왜 나는 그 아이의 별 것도 아닌 질문이 마치 아픈 곳을 찔린 것처럼 불편했을까.
요즘 방송가의 유행은 아무래도 '종편행'인 것 같다. 아는 선배는 얼마에 어디로, 아는 후배는 또 얼마에 어디로 옮겼다는 소식이 이제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안 되는 시절이다. 소속을 옮기는 조건으로 월급쟁이 피디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를 이적료로 지불하는 종편사들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렇게 많은 공영방송의 피디들이 기꺼이 종편행을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공영방송 종사자들이라면 프로그램의 공영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숙명처럼 주어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일에 부여된 기본 원칙은 자본과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임은 방송학개론 제1장 1절에 나오는 말이다.
지난주 한국피디연합회에서 발행하는 PD저널의 1면 머릿기사로 나온 두 사람이 있다. 그 두 사람은 3년째 해직 언론인으로 살고 있다. 공영방송에 종사했던 그들은 방송학개론 제1장 1절에 나오는 말을 실천으로 옮긴 죄로 3년째 월급도 못 받고 있다.
나는 차마 그들의 인터뷰 기사를 맘 편히 읽을 수 없었다. 일단은 미안하고 그 다음엔 부끄러웠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아픔 때문에 너무 미안했고 그저 별일 없이 월급을 받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돈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소중한 가치들이 결국 돈으로 거래되고, 돈으로 제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가치들도 돈에 제압당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언론의 가치는 너무나도 극적으로 평가절하 되고 있다.
그리고 언론인들은 당장 다음달 월급을 걱정해야 하는 삶의 자세를 새삼스레 부여 받았다. 이제 열일곱 열여덟 아이들도 언론인의 사명 따윈 관심도 없는 듯 하다. 이건 분명 열일곱 열여덟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들의 문제고 나의 문제다.
김한중 EBS 지식채널e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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