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가 온 유럽에 돈을 꾸러 다니는 그리스는 주권국으로서 자존심을 잃은 지 오래다. 정부가 세금을 얼마나 거둘지, 예산을 얼마만큼 집행할지는 아테네의 정부부처가 아니라 그리스의 생존 여탈권을 쥔 베를린, 파리, 브뤼셀의 관료들이 결정한다.
주권의 핵심이랄 수 있는 ‘곳간 열쇠’를 빼앗긴 그리스의 국민은 이런 치욕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정부의 재정긴축으로 세금이 늘고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도 고통이지만, 최근 수년 새 병원 관련 예산이 40% 이상 급감하면서 기본권인 건강권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9일 AP통신은 “예산 급감의 여파로 그리스 국민들이 의료 접근권을 잃고 있다”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유발하는 HIV 바이러스 등의 위험에 쉽게 노출돼 생명을 잃는 경우가 빈발한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이 그리스 의회 자료와 의학저널 란셋을 근거로 보도한 그리스의 보건 현실은 충격적이다. 올해 HIV에 새로 감염된 환자는 지난해보다 52%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마약 사용자들이 돈을 아끼기 위해 한번 쓴 주사기를 다시 쓰는 등의 비위생적인 방법으로 정맥주사를 놓고 있는 게 원인으로 지적된다. 상당수 여성들이 성매매에 나선 것도 HIV 감염률을 증가시킨 요인이다. 정부가 노숙자 지원 프로그램을 중단하면서 헤로인 사용건수도 20%나 늘었다.
약 살 돈이 없어 심각한 의약품 부족 현상을 겪는 병원들도 속출한다. 스위스 제약사 로슈는 최근 “3, 4년간 약값을 내지 않은 병원이 있어 사업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다”며 그리스 일부 국영병원에 항암제 등 필수 의약품 공급을 중단했다. 아테네의 종합병원 응급실을 취재한 일간 가디언은 “최근 실직한 당뇨병 환자가 인슐린 처방도 받지 못한 채 발길을 되돌리고 있다”고 전했다. 외래환자가 진찰비 5유로(7,800원)를 내지 못해 병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은 흔한 광경이다.
2년 가까이 팍팍한 생활을 하다 보니 낙천적이던 그리스 국민의 정신건강에도 이상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그리스 국민의 자살률은 전년보다 25% 늘었고, 올 상반기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40% 급증했다.
그리스 보건 실태를 조사한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은 “국가부도의 대가를 평범한 국민이 치르고 있다”며 “그리스의 현실은 경기침체 과정에서 보건ㆍ의료 예산을 줄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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