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5시. 해가 조금씩 빛을 잃어갈 무렵, 부산 해운대구 중1동의 조그마한 미술관 옥상은 환호성과 박수로 떠들썩했다.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주최한 행사 '부산에서 만나는 홍상수와 이사벨 위페르'에 모인 100명 남짓한 영화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현존하는 최고의 여배우이며 특히 한국의 여배우 80% 가량이 가장 존경하는 배우로 꼽는"(허문영 시네마테크부산 원장) 위페르는 지난 7월 전북 부안에 머물며 홍 감독의 신작 '다른 나라에서'를 촬영했다.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칸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 베니스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수상한 위페르는 올해 부산영화제를 찾은 진객 중의 진객이다.
당초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대화가 예정됐으나 두 사람이 직접 던진 질문은 단 하나, 홍 감독이 위페르에게 말한 "괜찮나요?"(Are You OK?)였다. 위페르는 웃음과 함께 "감독에겐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거장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며 홍 감독에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를 맡은 허문영 원장과 팬들의 질의로 두 사람의 간접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홍 감독이 위페르를 캐스팅한 이유는 단순 명쾌하면서도 좀 엉뚱했다. "지난 5월 위페르가 서울에 왔을 때 점심 초대를 했고, 너무 좋아하는 배우라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새 영화 출연 제의를 했다"고 말했다. "그냥 같이 할 마음이 있냐고 했더니 바로 '예스'가 나와 운명이라 생각했다"며 홍 감독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프랑스의 클레어 드니 감독을 통해 오래 전 안면을 튼 위페르에 대한 홍 감독의 첫 인상은 "예쁘게 작은, 그리고 정신이 매우 안정된 사람"이었다고.
위페르는 "홍 감독 영화로는 '남자는 여자의 미래'를 처음 봤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홍 감독 영화에 출연하고픈 꿈이 있었는데 이렇게 실현될지 몰랐다"고 말했다. "홍 감독이 '무슨 영화를 찍을지 모른다. 찍고 싶은 장소와 배경이 있는데 거기 가보고 싶으냐'고 물었어요. 일단 배경을 그리고 등장인물인 나를 그곳에 심는 독특한 연출 방식이 마음에 들어 출연을 하게 됐어요."
위페르는 홀로 한국을 찾아 '다른 나라에서' 를 찍었다.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살다가 이혼에 직면한 프랑스 중년 여인이 그의 역할이었다. 허 원장은 "촬영장을 찾았을 때 위페르가 브로콜리와 간장을 혼자 먹고 있어 신기했다. 외로운 여행자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위페르는 "브로콜리를 뺏길까 봐 매니저를 데려오지 않았다(웃음). 누군가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의 행동이 영화의 핵심이라 생각해서 외딴 곳에 혼자 가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위페르는 "대본을 받지도, 어떤 연기를 하게 될지도 몰랐는데 그게 계약 조건이었다"고 덧붙였다.
"저의 영화 선택 기준은 감독입니다. 인물이 매력적이고 시나리오가 아무리 좋아도 감독이 바보면 그 영화는 망합니다. 감독만 훌륭하면 됩니다. 대본도 없이 감독만 보고 선택한 이번 경우가 그 예가 되겠군요."
위페르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책이 뭐냐는 한 팬의 질문에 "너무 많아 하나를 집어 말할 수 없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한 스페인의 유명 감독) 루이스 브뉘엘의 자서전 <나의 마지막 한숨> 을 읽고 많은 영감과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프랑스 영화평론가 한 분이 홍 감독을 한국의 브뉘엘이라 했는데 홍 감독의 고도의 의도가 있었는지 촬영장 숙소 객실에 그 책이 놓여 있었어요. 촬영하며 내내 읽었습니다." 나의>
위페르의 말에 홍 감독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렇게 홍 감독의 어느 영화 속 장면처럼 이상하면서도 흥미진진한 1시간 동안의 간접대화는 저문 해와 함께 막을 내렸다.
부산=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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