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이겨야 끝이 나는 사각의 링. 사람 대신 인간형 로봇이 링 위에 선다. 로봇에게 링을 내준 사람은 아래에서 로봇을 조종한다. 크기 2.5m, 무게 900㎏이 나가는 로봇들의 거친 싸움. 몸이 맞부딪히고 주먹을 날릴 때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메운다.
12일 개봉하는 영화 '리얼스틸'은 팔이 끊어지고 머리가 부서져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파괴돼야 끝나는 로봇 복싱 세계를 다룬다. 영화의 배경은 지금부터 9년 뒤인 2020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로봇 복싱을 즐길 수 있을까. 국내에서 가장 앞선 인간형 로봇 '휴보2'를 제작한 카이스트 휴머노이드로봇연구센터(휴보랩)를 찾아 그 가능성을 살펴봤다.
태극권 하는 휴보2
6일 카이스트 휴보랩에 들어서자 김인혁 연구원이 휴보2 4대를 조립하고 있었다. 검은색 골격만이 앙상한 휴보 2의 모습이 생경했다. 김 연구원이 그 중 한 대와 연결된 노트북에서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그러자 휴보2가 두 팔을 머리 위로 재빠르게 올렸다가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천천히 내렸다. '윙'하는 모터 소리가 매끄러웠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동작. 아니나 다를까. 김 연구원은 "태극권을 따라한 것"이라며 "태극권 외에도 여러 동작을 모션캡처해 프로그램 언어로 바꿔주면 다양하게 움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옆에 있던 오준호 카이스트 휴머노이드로봇연구센터장(기계공학과 교수)이 팔목에 붙이기 전인 휴보2의 손을 건넸다. "한 번 잡아 봐요. 신기하다니까." 휴보2의 손가락 5개가 부드럽게 움켜쥐어졌다. 꼭 사람과 악수하는 편한 느낌이었다. 오 교수는 "손가락마다 센서가 붙어 있고 손가락의 움직임을 관절 15개로 세세히 조정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물건이든 쥘 수 있다"고 했다.
휴보랩은 2009년 휴보2를 선보였다. 그 후 2년, 휴보2의 안정성을 높이려는 연구가 계속 됐다. 균형을 잡는 등 여러 역할을 하는 센서를 완전히 바꾸고, 사람으로 치면 혈관 격인 전선도 좀 더 얇으면서 질긴 걸로 교체했다. 오 교수는 "이전엔 조립한 다음 걷게 하는 데 두 달이 걸렸지 지금은 조립만 하면 바로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
'환골탈퇴'한 휴보2는 이달 초 싱가포르 정보기술(IT) 국책연구기관에 2대가 팔렸다. 조립 중인 4대 중 3대는 곧 미국으로 보낸다. 대당 가격은 40만 달러(약 4억 7,000만원).연말까지 3대를 더 만들어 보낼 계획이다. 이렇게 수출한 휴보2 6대는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 퍼듀대, 카네기멜론대 등 미국 대학 6곳에 각각 1대씩 배치된다.
균형 잡기, 동력원 문제
현재 휴머노이드 로봇 기술이 가장 앞선 나라는 일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머노이드 로봇 4인방(휴보, 아시모, HRP, 파트너) 중 휴보를 뺀 나머지는 모두 일본에서 만들었다. 그러나 오 교수는 "휴보2를 포함해 현재 개발된 휴머노이드 로봇은 연구에 쓰이거나 전시할 정도 수준"이라며 "영화처럼 로봇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권투를 하기까진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라고 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균형 잡기다. 권투를 하려면 로봇이 주먹을 날리고 막을 때, 움직일 때 모두 하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쓰러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기술을 구현한 휴머노이드 로봇은 아직 없다. 휴보2도 평지에선 시속 3.6㎞로 잘 달리지만 갑자기 방향을 틀어 균형을 잡는 일 등은 어렵다. 미국 로봇 개발업체에서 만든 네 발 로봇 '롭소'가 경사로를 오르는 등 가장 진보된 균형 잡기 기술을 보여주지만, 이마저도 발로 세게 차면 넘어지는 수준이다.
휴보2는 키 1.2m에 몸무게는 배터리를 포함해 44㎏이다. 영화 속 로봇처럼 휴보2가 두 배 커졌다면 몸무게는 352㎏(44㎏×8)이 된다. 길이가 n배 증가할 때 면적은 n²배, 무게는 n³배 늘기 때문이다. 오 교수는 "영화 촬영용으로 만든 모형 말고 실제 강철로 권투 로봇을 만든다면 무게는 영화 속에 나온 900㎏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고 말했다. 휴보2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알루미늄합금으로 제작했다.
문제는 이를 움직일 동력원이다. 오 교수는 "휴보 등 휴머노이드 로봇이 쓰는 전기 배터리는 출력이 약해 거대 로봇의 동력원으로 적절하지 않다"며 "로봇 몸 안에 달 발전기를 개발하거나 힘이 좋은 유압모터를 쓸 수 있지만 아직까지 휴머노이드 로봇에 적용된 적은 없다"고 했다.
대전=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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