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진경 지음/휴머니스트 발행·368쪽·1만8,000원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철학적 장면을 포착해 예민한 글로 남겼는데, 이 방법은 역설적으로 현재의 한국 독자들이 그의 글이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우리는 벤야민처럼 1930년대 파리 아케이드를 거닐 수 없으니까.
2000년대 독자가 벤야민의 문장을 이해하려면 길잡이의 도움이 필요한데, 가장 탁월한 길잡이로 미국 이론가 수전 벅 모스가 손꼽힌다. 1970,80년대 벤야민 연구로 이름을 알린 그는 1990년대 이후 벤야민을 넘어서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을 펼치고 있다. 국내 번역된 에세이 <꿈의 세계와 파국> 은 그 터닝 포인트가 된 책으로, 미국 월트 디즈니 이미지 분석을 통해 포스트모던 사회의 정치를 말한다. 이제 그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갖게 됐지만, 당연하게도 이 목소리의 언저리에는 벤야민의 숨결이 남아 있다. 꿈의>
철학자 이진경씨를 소개하며 생뚱맞게 벤야민과 벅 모스를 소개한 것은 신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이 꼭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 과 닮은 꼴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이진경은 이 책을 통해 자신만의 사유를 펼치고 있지만, 동시에 이 책에는 그를 있게 한 마르크스와 들뢰즈의 사상이 깨알처럼 녹아 있다. 6일 연희동 '수유너머N'에서 만난 그는 "이제 도제 생활은 끝났다"고 말했다. 꿈의> 불온한>
그의 돌파구는 하이데거다.
"하이데거의 위대한 점이 존재를 의심하는 '존재자'의 발견이잖아요. 하지만 인간을 통해서 인간을 사유하려는 시도에는 인간을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일종의 특권의식이 있는 셈이죠. 저는 인간이 아닌 것들로 인간을 사유하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컨대 저자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전복하며 사상의 아버지들을 넘어서려는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인 이진경 식의 존재론은 책 2장에 담겨 있다.
책의 또 다른 키워드는 '불온함'인데, 들뢰즈의 '탈주' 개념이 변형된 꼴로 읽힌다. 그는 "불온함이란 통념이나 분명한 구별들이 깨질 때 발생하는 불안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던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책 1,2장에서 불온함과 존재론의 개념을 정리한 후 3~8장에서 사이보그, 박테리아, 프레카리아트(파견, 하청, 계약직 등 극도로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같은 불온함을 지닌 존재자들을 소개한다. 존재자의 범위를 인간보다 넓혔기 때문에 책에서 '장애인'은 '장애자'로 썼다. 이씨는 "이들의 공통점은 중간적인 존재자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존의 존재자, 즉 인간의 구획에 따라 명료하고 뚜렷하게 구별된 것들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구별을 깨거나 와해시키거나 중간에 끼어 있는 존재자를 의미한다.
"사이보그는 인간도 기계도 아니지만 동시에 인간, 기계이기도 합니다. 박테리아는 생물이라고 할 수도 없고, 생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죠. 프레카리아트 역시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니기도 합니다. 이 중간적 존재자들이 기존의 경계를 해체시킵니다."
이씨는 "마르크스의 위대한 점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 당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를 전복시킬 수 있는 주체로 보았다는 것"이라며 "타자를 보는 관점을 바꿀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나온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인 장애자, 프레카리아트 등은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결핍을 보여주어 기성 체제를 전복시키는 존재자라는 설명이다.
철학 책을 자주 접하지 않았던 독자라면 이 책이 버거울 것이다. 분량도 300여 페이지나 된다. "일반인들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저자는 "어려운 책이 꼭 안 팔리는 건 아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아름답고 충격적인 책이 <벽암록> 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이해가 안 가는데도 손에서 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놀랍지 않아요? 이해되지 않는데도 끌리는 책. 이 책이 그런 매혹을 주는 책이기를 바랍니다." 벽암록>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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