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 556번지. 단양읍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25분 정도 가면 보발분교 마을이 나온다. 거기서 다시 1㎞ 정도 산길을 걸어 올라가면 해발 490m에 가톨릭 신앙공동체 ‘예수살이 공동체 산 위의 마을’이 오롯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때 ‘좌파 신부’로 불리던 박기호(62) 신부가 터를 닦은 무소유 신앙 공동체다.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은 별칭을 무척 껄끄러워 했다. 그런 낙인을 받게 된 것은 정의구현전국사제단 활동과 현실 비판적인 강론 때문이었다. 물론 ‘노동의 새벽’ 박노해 시인의 친형이라는 사실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2006년 2월 16년간 사목하던 서울을 등지고 사제복과 로만칼라 대신 고무신과 작업복 차림으로 5박6일을 꼬박 걸어서 이곳 단양 소백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주임신부(서교동성당) 임기를 끝내자마자 산 위의 삶을 선택한 이유는 최근 펴낸 책 (휴 발행)에 상세히 담겨 있다.
박 신부는 5일 전화 인터뷰에서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홍해를 탈출하는 히브리 노예처럼 서울을 벗어났다”며 “애굽(이집트)의 고기가마와 채소를 그리워한 노예들처럼 한 때 서울생활을 잊지 못했지만 이제는 산 위의 마을에서 살 길을 찾았다”고 말했다. “무소유 공동체는 우리 시대 ‘노아의 방주’예요. 우리는 신약성서 사도행전에도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공유하며 살았더니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기록한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는 이 무소유 공동체 삶을 알리기 위해 매월 한 차례 7박8일의 마을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현재 산 위의 마을에는 7가구 32명이 살고 있다. 그들은 북서풍을 막아주는 930m의 뒷산 아래 2,500평 대지에 집을 짓고 1만4,000평 밭에 콩과 고추, 더덕, 야콘 등을 키우면서 소비문명사회의 자발적 소외자를 자처하며 살아간다. 해가 뜨면 일어나 밭으로 나가고 오후 5시40분이면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한다. 저녁 8시면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난다. 밤 10시만 되면 가로등을 포함해 모두 15~20와트 전구를 쓰는 마을의 모든 불빛이 꺼진다.
이 마을 주민 중에는 학생들도 있다. 초등학생 4명은 전교생이 12명인 보발분교에 다니고, 중학생 2명은 홈스쿨링을 한다. 이 아이들은 “눈이 녹으면 무엇이 될까요?”라는 선생님 질문에 “봄이 됩니다”라고 답할 정도로 자연과 하나된 삶을 산다. 이 곳은 삼덕오행(三德五行) 즉, 사랑, 순명, 자비심과 기도, 노동, 공유, 배려, 정직을 바탕으로 농사일과 신앙생활을 일체화하고 있다. 마을에 들어올 때에는 가진 것을 모두 지참금으로 내놓고 친환경 유기농법으로 함께 노동하며, 소출은 공동 분배한다.
박 신부나 마을 사람들은 아직 초보 농사꾼이다. 뭘 해도 어수룩한 농부들은 좌충우돌하며 귀농 수업료를 톡톡히 치렀다. 그 와중에 20여명이 마을을 떠났다. 박 신부는 “농부야말로 진짜 전문직이라는 걸 느꼈다. 농사꾼 되려면 한참 멀었다”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마흔 둘에 늦깎이로 신부가 된 서울 샌님이 뒤늦게 농사꾼이 되었으니 그 고충이야 오죽하겠는가.
박 신부는 “그 동안 배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한 삶과 경험을 떠올리면 당연히 치러야 하는 수업료”라며 “앞으로는 돈 되는 농사를 지어 대학 가는 마을 아이들을 위해 장학금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라고 소박한 소망을 전했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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