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고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최저생활을 하면서도 불우한 어린이들을 후원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숨진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 씨의 삶을 되새기면 부끄럽다. 성폭행과 학대 피해를 당한 청각장애아들을 그린 영화 <도가니> 를 생각하면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게다가 언론인 출신 고위공직자들이 돈을 받고 구속되거나 조사를 받게 된 상황은 같은 언론인으로서 창피하고 내 일처럼 부끄럽다. 도가니>
참여의식 높아진 우리 사회
이런 몇 가지 사건을 보면서 우리사회에 대해 실망하고, 분노를 키워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특히 소설에 이어 영화로 폭로된 인화학원 사건은 지금까지 이웃과 사회에 대해서 무관심했거나 외면하고 살아온 사람들을 각성케 했다. 개봉 2주 만에 관객 300만을 돌파한 <도가니> 는 어느덧 이와 유사한 사건과 사회현상을 재보고 따져보는 잣대가 됐다. 도가니>
영화를 보고 실제와 혼동을 일으키거나 사건을 담당한 판사 경찰관은 물론, 악역을 연기한 배우들에게까지 반감과 적대감을 표시할 만큼 영화의 충격은 컸다.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불편해 아예 관람을 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정도다. 사회적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봐야 한다는 분위기는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다시 절감하게 한다.
관객들은 사회부조리에 분노하면서 이 정당한 분노를 통해 스스로 인권운동에 참여하는 듯한 감정이입을 체험하고 있는 것 같다.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 연민을 담은 동정(sympathy)을 넘어 진정한 공감(empathy)의 단계로 감정이 고양되는 것은 보기 드문 현상이며 중요한 경험이다. 이런 분노는 공분(公憤)이며 공분(共憤)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분은 공감의 바탕에서 형성되며 각종 사회문제의 해결능력을 모색하는 힘이 된다. 공감의 바탕이 없는 공분은 의미가 없다. 그런 분노는 나쁘게 말하면 관음증에 가까운 천박한 감정이거나 '우아한 비겁'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문제가 바로 나의 문제일 수 있다는 인식, 함께 힘을 합치면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만드는 것이 공분의 참된 의미이다.
이런 인식은 자연스럽게 6년 전의 상황에 대한 반성이나 참회와 연결된다. 사건 당사자인 판사와 검사, 경찰의 소회가 알려지고 당시 행정관청 관계자들의 행적이 도마에 올랐다. 언론은 그 동안 무엇을 했는가, 나는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무슨 일을 했던가 하는 반성이다.
그러나 '도가니'에 대한 관심은 끓는 도가니 식듯 곧 식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 이보다 더한 사건도 곧 잊혔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사회는 언제나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전반적 실태 조사와 법 개정, 경찰의 추가 수사, 교사들의 성범죄 경력 여부에 대한 전수조사, 성폭력특례법 개정 논의는 모두 필요한 일이지만 지금의 다짐과 달리 다른 문제에 덮여 지지부진해질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사회는 종전과 달라져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들이 사회현상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면서 신속한 소통과 전달을 통해 의식을 공유하는 현상이 정착됐고, 시민으로서의 자세도 바뀌고 있다. 정보 접근과 획득이 용이해지면서 참여의식, 인권과 복지에 대한 의식은 더욱 더 높아졌다.
'발정난 사회' 바로잡아가기
사회복지시설의 투명성과 인권 강화를 위해 보건복지부는 어제 '사회복지투명성ㆍ인권 강화위원회'를 구성했다. 사회복지시설의 족벌운영을 막기 위한 공익이사제 도입, 인권 옴부즈만제 도입, 시설 종사 성범죄자의 영구 퇴출 등이 주요 논의사항으로 제시됐다. 일종의 '도가니 대책위원회'인 셈인데, 중요한 것은 대책의 일관성과 지속성, 소수자의 처지에서 생각하기, 대책기구가 권력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도가니> 의 소설가 공지영 씨가 말한 대로 우리사회는 '발정난 사회'다. 발정난 사회가 빚어내는 성폭력 범죄와 인권 유린을 막기 위해서는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공분의 에너지, 공분의 도가니를 잘 살리고 관리해야 한다. 도가니>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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