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채무불이행(디폴트) 위협 고조, 그에 따른 증시 추락. 그러나 이것은 재앙의 예고편에 불과할 수 있다. 더 공포스러운 시나리오가 세계 금융시장을 덮칠 기세다. 자본주의의 중추인 은행시스템의 건전성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징조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스 채권을 다량 보유한 프랑스와 독일 등 서유럽 주요 은행에서 이상징후가 속속 드러나며 대형 은행의 도미노 붕괴가 현실화했다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벌써 구제금융을 받은 은행이 등장했다. 4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프랑스와 벨기에 재무장관은 배드뱅크(부실채권ㆍ자산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은행)를 설치해 양국 합작은행 덱시아를 구제하기로 합의했다. 양국 재무장관은 이날 성명을 통해 “예금주와 채권자를 보호하고 덱시아 파산을 막기 위해 양국 정부가 자금 조달을 보증한다”고 밝혔다. 투입 금액은 최대 2,000억유로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구제금융을 받았던 덱시아는 유럽 재정위기 이후 국가 구제를 받는 첫 은행이 됐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채권을 각각 35억유로, 150억유로어치 보유한 덱시아에서는 이날 뱅크런(예금 대량인출 사태)이 발생, 3억유로의 예금이 빠져나갔다.
바람 앞의 등불 신세는 덱시아 뿐이 아니다. 무디스로부터 신용등급이 강등된 프랑스 최대은행 BNP파리바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8월 이후 8.5% 포인트 상승했고, 소시에테제네랄도 같은 신세다. 시사주간 타임은 “유럽 은행이 충분한 자본을 확보하지 못해 성장률 둔화나 재정위기 확산 같은 펀치를 더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라 전망했다.
건실함의 상징이었던 독일 은행마저 안심할 수 없는 처지다. 독일 최대 은행 도이체방크는 4일 “3분기 실적이 예상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 밝혔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문가 분석을 인용해 “코메르츠방크와 란데스방크 등도 은행시스템 위기가 지속될 경우 혼란을 피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유럽 은행이 비틀거리자 이들과 대규모 거래를 하고 있는 미국의 대형은행도 연쇄 충격을 받아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의 CDS 프리미엄이 치솟고 있다.
그리스에서 시작한 은행 위기가 다시 그리스 해법을 꼬이게 만드는 악순환도 이어진다. 로이터통신은 “은행이 그리스 구제금융 손실 부담 비율을 높이라는 정치적 압력에 저항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로존 재무장관들이 민간 부문이 부담할 그리스 채권의 원금손실(헤어컷) 비율을 21%에서 40~50% 정도로 올리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자기 살 길 바쁜 유로존 은행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은행권 도미노 붕괴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며 유로존의 선제대응을 강조한다.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해 은행 자본을 늘리는 재자본화나, 유로존이 개별국가 은행 파산에 직접 개입하는 은행연방주의 등이 해법으로 거론된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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