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청진항에서 목선을 타고 동해를 건넜던 탈북자 9명이 일본을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일행은 후드 티셔츠와 모자, 검은 선글라스와 흰색 마스크로 철저히 모습을 가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바깥을 살피는 어린이의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휴대폰이나 단파라디오를 통해 세상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최근 SNS를 통해 김정일의 손자가 바깥에 알려진 것과 함께 흥미로운 뉴스다. 그들 가운데 한 남성이 일본 조사과정에서 "아버지는 조선노동당에서 한국인 납북 업무를 담당했고, 할아버지는 백남운 전 최고인민회의 의장"이라고 밝혔다 한다.
■ 백남운(白南雲ㆍ1894~1979)에 대해서는 얘기하는 것 자체가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졌다. 6ㆍ25전쟁 납북 인사가 아니라 스스로 월북한 김일성 체제의 핵심인사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민중과 민족'과 관련한 인사와 문화에 대한 해금(解禁)이 이뤄지면서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도 가능해졌다. 여운형(呂運亨ㆍ1886~1947) 암살사건(7월 19일)이 그가 월북을 결심한 계기가 되었을 듯하다. 이듬해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남북협상)에서 김일성의 '북조선 정세보고'에 대응하는 '남조선 정세보고'를 발표한 뒤 북한에 눌러 앉았다.
■ 함께 짝을 맞춰 남북한 정세보고를 했던 만큼 김일성의 신임은 유별났을 터이다. 1948년 9월 9일 출범한 북한 첫 내각에서 교육상을 맡아 승승장구, 1967년부터 5년간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내고 사망할 때까지 한 번도 요직에서 비켜나지 않았다. 북한이 196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을 당시 김일성은 자신보다 18세 위인 그를 멘토처럼 여겼던 듯싶다. 그는 정치인이 되어 월북했지만 일본 동경상과대학을 나와 연희전문학교에서 13년간 교수를 지낸 엘리트 경제학자였다. 대표적 저서인 (1933)는 경제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의 필독서였다.
■ 해방 후 그의 정치적 행보는 '경제적 효율'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래서 좌측으로부터는 제대로 된 좌가 아니라고 공격 받고, 우측으로부터는 색깔이 붉다고 배척당한 모양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개척했다'(연세대 고 방기중 교수 논문)는 평가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 중이다. 9명의 탈북자로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그가 정치인으로 남겼던 말이 새롭다. "입장과 노선이 다르다고 해도 상대방에 대한 저열한 비방은 삼가는 것이 정치의 대도다." 남북은 물론 국내에서도 유효한 의미를 갖는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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