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R이 자기소개서를 써와서 내밀었습니다. 한 번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R은 늘 도서관에서 '열공'하는 차림이었는데 그날은 지난 봄 교생 실습 때 입고 다니던 멋진 양복 차림이었습니다. R에게 국어교사를 뽑는 임용시험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R은 그 시험을 위해 42.195km를 완주하는 마라톤 선수처럼 달려와 요즘은 결승점을 앞두고 마지막 스피드를 내듯 열심히 시험공부에 매달려 있었는데, 무슨 자기소개서인가 싶어 읽어보다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컥해졌습니다. 그건 모 금융기관 입사지원서에 첨부하는 자기소개서였습니다.
그렇게 꿈꾸던, 무명교사의 길을 포기했는지 물으니 그건 아니라고 했지만 R의 어깨에는 평소보다 힘이 빠져 있었습니다. 얼마 전 어머니가 그 금융기관에 다니는 외삼촌과 함께 찾아와 조심스럽게 입사지원서를 건네주고 갔다는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사범대학에 입학해 교사의 꿈을 꾸며 착실하게 노력해온 R인데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로 한 모양입니다.
부모의 심정은 아들이 가는 '좁은 문'이 불안했나 봅니다. 입사하면 본인이 하고 싶은 업무에 R은 '금융 업무 중에서도 제일선에서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일들을 맡아서 하고 싶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두 갈래 길에서 수없이 고뇌했을 R에게 '무슨 길을 가든 너를 지지한다'고 했지만 한 젊은이의 꿈을 껴안아주지 못하는 이 현실에 화가 났습니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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