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의 패션은 13년 동안 바뀐 적이 없었다. 1998년 PC '아이맥'발표회 이래 마지막 프리젠테이션이었던 지난 6월의 아이클라우드 설명회까지 그는 항상 검은 색 터틀넥 셔츠에 벨트 없는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는 이 패션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그냥 편해서"라고 했다. 어떤 저널리스트는 "제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본인은 튀지 않는 옷을 입는 고도의 전략"이란 분석을 내놓았고, 어떤 패션전문가는 "아이폰은 계속 업그레이드되는데 패션은 왜 업그레이드되지 않는가"란 혹평을 가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평범하면서도 동시에 비범한 스타일은 잡스의 아이콘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CEO도 공인이다
미국만큼, 보다 정확하게는 미국 IT업계만큼 CEO가 주목 받는 곳도 없을 것이다. 잡스는 워낙 유별난 인물이라 정도가 심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구글의 래리 페이지, 그리고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까지, 이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뉴스가 되고 주식시장에서 재료가 된다.
기업 입장에서, 또 CEO 개인으로서도 과도한 관심은 분명 부담이다. 헐리웃 배우도 아닌데, CEO는 결국 실적으로 평가 받는 것인데 옷을 잘 입었느니 못 입었느니, 프리젠테이션 스타일이 어떻다느니 입방아에 오르고 심지어 파파라치까지 따라붙는 건 확실히 과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규모 큰 기업의 CEO라면 일정 부분은 '공인'이란 점을 부인해선 안 된다. 국민경제에 또 주식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라면, 어떤 정치인이나 운동선수, 연예인보다도 주목 받는 건 당연하다고 본다. 굴지의 기업 CEO라면 대중스타는 아니더라도, 시장스타라도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사실 한국 기업과 미국 기업의 두드러진 차이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CEO의 스타성이다. 엄밀히 말해 미국 기업에 필적할 만한 한국 기업은 많지만, 잡스나 게이츠에 견줄 만한 CEO는 우리나라에 없다. 경영능력이나 판단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CEO, 시장과 소비자를 이끄는 CEO가 한국 기업에는 없다는 뜻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어느 기업의 CEO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게 현실이다.
기업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다. 오너 겸 CEO인 미국의 IT스타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대부분 오너와 CEO가 분리되어있고 이런 상황에서 '월급사장'이 너무 튀고 너무 주목 받는 건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다. 그러다 보니 괜히 나섰다가 수명만 단축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요즘 시장은, 요즘 소비자는 그렇게 수동적이지 않다. 과연 전세계 소비자들이 아이폰에 열광한 것이 오로지 아이폰 성능 때문만이었을까. 아니다. 그들은 아이폰과 함께 잡스도 함께 구매했다. '아이갓(iGod=잡스의 별명)'신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설령 그것이 허상이라 할지라도 '스타'잡스를 향한 열광과 신뢰가 아이폰 구매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아이폰과 함께 잡스를 산다
잡스는 CEO로서 사망선고를 받았지만, 세계IT산업은 여전히 그의 그늘에 짓눌려 있다. 애플 대 반(反)애플진영으로 양분된 이번 IT전쟁도 따지고 보면 잡스 대 나머지 IT업체들의 싸움이다. 산 사마중달이 죽은 제갈공명을 전투를 벌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젠 한국의 CEO들도 좀 앞에 나서줬으면 한다. 꼭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 아니어도 좋다. 현란한 프리젠테이션도 하고, 즉석에서 일문일답도 하고, 때론 경쟁자를 향해 독설도 퍼붓는 그런 CEO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소통을 통해 CEO는 그냥 최고경영자 아닌, 마켓 리더가 되고 소비자의 우상이 되는 것이다. 이게 CEO프리미엄이다. 등장 만으로도 흥분되는 그런 스타CEO를 보고 싶다.
이성철 산업부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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