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장이 인사·예산 등 전권 행사 "그 앞에선 입도 벙긋 못해요"
올해 3월 새 학기를 앞두고 A고교에서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학년부장에 40,50대 선배 교사들을 제치고 30대 젊은 교사가 발탁된 것. 학년부장은 보통 15년차 이상의 교사가 맡는다. 공교롭게도 인사에서 '물 먹은' 교사 대부분은 진보성향 교원단체에 가입했거나 교장과 의견대립을 보여왔던 인물들이었다. 교사들 사이에선 부장 임명권을 가진 교장이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을 배제시켰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교장 눈 밖에 나는 게 두려워 누구도 선뜻 문제삼지 못했다. 하지만 무리한 인사의 후폭풍은 컸다. 선배 교사들에게 일일이 지시하는 게 불편했던 신참 학년 부장은 모든 업무를 혼자 떠안은 채 끙끙댔고 학사 운영은 엉망이 됐다.
교장은 제왕… 눈 밖에 나면 끝장
대한민국 학교는 흡사 군대와 같다. 교장, 교감, 교무부장, 연구부장 등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식 구조는 교사들에게 오로지 상명하복만을 강요한다. 인천의 한 고교 교사는 "교사들은 인사권자인 교장의 말 한마디에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다. 자유롭게 말 한마디 못하고 숨조차 맘대로 쉴 수 없는 폐쇄적인 불통 사회"라고 잘라 말했다.
전국의 초중고 교사들이 밝힌 교장의 횡포는 다양했다. 경기의 한 초등교사는 "업무처리 방식에 새로운 의견을 냈다가 다음해 비희망 학년에 배치됐고 전 교직원이 참여한 교무회의에서 심한 모욕을 들었다"고 억울해했다. 경기의 한 고교 교사는 출산 후 복귀하자마자 고3 담임을 맡았다. 출산 1년 미만의 교사는 과중한 업무에서 배려 받을 권리가 있지만 교장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승진 성과급 등 칼자루 들고 군림
하지만 교사들은 입 한번 뻥긋 못한다. 학교에서 교장의 권한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교장은 ▦보직교사 임명권 및 근무성적 평정, 인사고과 평가 ▦학생생활지도를 위한 교칙개정 ▦시설 개선 등 예산 집행 및 업체 선정 ▦기간제 교사 채용 및 면직 등 학교 운영의 전권을 갖는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업무의 최종 결정은 모두 교장의 손을 거친다고 보면 된다.
특히 승진, 성과급 등의 결정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교장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2008년부터 승진을 앞둔 교사들에 대한 근무평정에서 동료교사의 다면평가(30%) 항목이 반영되긴 했지만 여전히 교장(40%) 교감(30%)의 입김이 세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경남 김해의 한 초등학교에선 교감승진을 앞둔 50대 여교사가 교장에게 근무평정을 잘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하자 이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도 있었다. 경기의 고2 담임 교사는 "승진에 신경 써야 할 연차의 교사(15년차)들은 본격적으로 관리에 들어가 근무평정 점수 따기에만 열을 올리다 보니 수업은 안중에도 없다"고 고백했다. 서울의 중2 담임 교사도 "교장의 명령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심지어 명찰을 달고 근무하라는 지시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자조했다.
교장 눈치 보느라 아이들은 뒷전
인천의 한 중학교 교사는 학생들간 폭력문제가 발생해 학부모 상담을 하느라 교무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는데도 다음날 사유서까지 제출했다. 이 교사는 "교감 선생님은 '지금 뭐가 중요한지 분간을 못한다'며 한바탕 호통을 치셨는데, 학교에서 아이들 말고 교무회의가 더 중요하다는 거냐"고 반문했다. 교사들은 수업 중간 공문을 빨리 마무리하라는 독촉 전화를 받는 일은 예사라고 입을 모았다. 올해부터 교원성과상여금 제도에 학교평가가 일부 반영되면서 실적을 높이기 위해 교장 교감은 교사들을 더욱 쥐어짜고 있다. 경기의 한 초등교사는 "(학교 평가에 반영되는) 전국 단위의 줄넘기 대회를 준비하라고 코앞에 예정된 현장학습도 가지 말라는 압력이 받았다. 아이들이 소풍을 못 가게 돼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견제장치 없어 비리 만연
하지만 교장의 권력을 견제할 장치는 전무하다. 민주적인 학교 운영을 위해 각 학교마다 학부모와 외부인사가 포함된 학교운영위원회가 설치돼 있지만 심의기구에 불과해 실효성이 떨어진다. 경기 성남의 한 중학교 교감은 "인사자문위원회, 성과급평가위원회 등등 형식적인 위원회는 많지만 이와 상관없이 교장이 한번 결정하면 끝"이라고 단언했다.
교장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업무가 처리되다 보니 비리도 만연하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선 불성실한 강의로 해고될 위기에 처한 한 원어민교사가 교감의 민원으로 재임용됐다. 원어민교사 관리 업무를 맡은 이 학교 영어교사는 "교감이 점수?높여 평가표를 다시 작성하라고 압력을 넣었다"고 말했다. 수업 기자재 등 업체 선정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선 사물함 설치 공사를 하는데 공개입찰에 참여하지 않은 업체가 선정됐다. 이 학교 교사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회사 사장과 교장이 '절친'이라고 하더라. 사물함 문이 자꾸 떨어져서 교사들 사이에선 부실업체라는 불만이 나오지만 속으로만 삭힐 뿐이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대한민국 학교는 입도 귀도 막고 사는 닫힌 사회"라며 "교사들조차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해본 경험이 없는데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교육을 하는 것은 모순 아니냐"고 쓴웃음을 지었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김혜영기자 shine@hk.co.kr
■ "민주적 의사결정 위해 교무회의를 의결기구로"
"교무회의 때면 교감의 지시사항을 마치 학생처럼 받아 적는다. 그리고 그 내용을 그대로 조회시간에 앵무새처럼 학생들에게 전달한다. 교무회의 시간이라고 해봐야 10분 남짓이고, 왜 이렇게 해야 하냐고 질문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다."(경기의 초등학교 A교사)
"학교 안에서 가장 민주적인 절차로부터 소외된 집단이 교사다. 학생들도 학생회가 있고, 형식적이나마 학급회의를 통해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배우지만 교사들의 교무회의는 토론이란 게 없다."(서울 중학교 B교사)
교사들은 학교 내에서 민주적인 의사소통이 이뤄지려면 교무회의가 실질적인 의결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교과별 소모임을 제외하면 교무회의는 교사들이 학교 운영과 교육과정, 수업 등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그러나 교무회의의 운영방식이나 결정사항에 대한 어떤 근거 규정도 없다. 때문에 전국교직원노조 등 교원단체에서는 교무회의의 법제화를 주장하고 있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지금의 교무회의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회의지만 교장 교감 입장에선 적절한 지시와 통제를 하기 쉽기 때문에 관행적으로 열고 있다. 특히 특정학교의 선후배 인맥이 강한 초등학교에선 평교사들의 의견 개진 통로가 사실상 막혀 있어 더욱 공식적인 권한이 부여돼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도의 한 중학교 교사도 "교무회의가 법적 권한을 가진 의결기구가 되면 교사들이 모은 의견을 교장이 마음대로 뒤집는 경우는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교사들은 형식적 기구로 전락한 학교운영위원회가 실질적인 심의기구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도 교무회의가 의결기구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서울의 한 중학교 교사는 "학교운영위원회는 교사 위원(30~40%), 학부모 위원(40~50%), 지역 위원(10~30%)으로 구성돼 교장의 권한을 견제하고, 학교 운영의 주요 사항을 심의하도록 돼 있지만 대부분 교장과 친분이 있는 위원들이 선출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견제 역할을 못한다"고 지적했다. 초중등교육법에 따르면 학부모와 교사 위원은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지역위원은 추천을 받아 학부모와 교사 위원의 무기명 투표로 뽑도록 돼 있다. 이 교사는 "나서는 교사가 없기 때문에 교사 대표는 교장의 신임을 얻는 교사가 뽑히고, 지역 위원도 교장과 친분이 있는 전직 학교운영위원장 등이 선출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학부모 대표 역시 교장에게 잘 보여야 하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사실상 학운위는 교장의 입김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방의 한 고교 교사는 "학운위의 큰 축을 이루는 교사와 학부모 대표의 역할이 중요한데 교사회가 교사들을 대표하는 기구로 꾸려지고, 임의단체인 학부모회도 전체 학부모를 대표하는 위상을 갖는다면 학운위의 심의기능이 지금보다 훨씬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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