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산정에서 마시는 '정상주'가 있고 산행 뒤에는 '하산주'란 술이 있다. 말 그대로 산과 사람이 함께 나누는 술이다. 그건 폭음의 술이 아니라 피로에 지친 몸을 풀어주는 맑고 가벼운 한 잔이다. 하산주는 더운 날에는 땀을 뻘뻘 흘린 뒤의 갈증을 씻은 듯이 씻어주고, 추운 날에는 몸에서 빠져나간 체온을 따뜻하게 되찾아준다.
하산주는 산행의 마침표와 같다. 가을 산행을 하고 마침표를 찍지 않고 헤어질 수가 없어 함께 한 분들을 은현리 청솔당으로 초대했다. 하산주로 여러 해 아껴둔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땄다. 좋은 인연의 선후배가 부부 동반으로 떠난 산행인지라 레드와인과 아이스바인을 내놓았다.
오랜만에 '쨍'하며 부딪히는 와인 잔의 경쾌한 소리가 좋다. 산을 내려와도 몸과 마음은 여전히 산 위에 있어 산정 아래에서 만난 비탈진 억새밭과 산길 따라 끝이 없이 피어있던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함께 따라온다. 어느새 가을 산이 좁은 청솔당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하산주를 마신다.
붉어지는 내 얼굴빛처럼 창밖엔 노을이 꽃처럼 피었다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와 촛불을 밝혔다. 키 작은 촛불 하나로도 방 안이 환해진다. 산 위의 일이 도란거리는 추억이 되는 시간, 오랜 만에 청솔당에서 쏟아지는 웃음소리에 별밭을 펼치던 솥발산이 궁금해서 고개를 숙이고 엿듣는 시월의 밤이 있었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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