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진실이가 이맘때 갔지. 벌써 3년이 됐네. 생각하니 또 착잡해지는구먼.
그때 기자들한테 전화를 좀 받았어. 선배로서 아끼던 후배에 대해 좀 얘기해달라고, 말하자면 추모사 같은 걸 부탁하더군. 근데 내 말은 한 마디도 언론에 못 나갔어. 당연하지. 내가 막 욕을 해댔거든. 그런 ○○○이 어딨냐고, 아니 제 목숨이 어디 저 하나의 것이냐고, 그런 나쁜 자식 얘기는 신문에 내지 마쇼, 하면서 내가 전화통 붙잡고 거친 말을 쏴 붙였던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자길 아끼는 사람들한테, 사회한테 주먹질 한 거 아냐?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걷잡을 수 없이 분통이 터지더라고.
왜 그렇게 화가 났냐고? 글쎄… 진실이를 그만큼 아꼈기 때문일 거야. 사실 여배우더러 "내가 네 팬이다" 하고 말한 게 딱 최진실 하나였거든. 뭐랄까, 1990년대 초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아이는 단순히 배우로서가 아니라, 여인으로서 한국인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어. 그게 내 생각만이었던 건 아닌 것 같아. 몇 년 지나서 어느 여대에 특강을 간 적이 있는데 학교 안에 온통 최진실이 왔다 갔다 하더라고. 학생들이 옷 입는 것, 머리 모양, 말투를 전부 최진실처럼 하고 다니더란 말야.
그래서 진실이가 잘 성장해 주기를 바랐어. 곱게 나이 먹으면서 여배우가, 또 한국 여인이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 거지. 모두들 본받을 만한. 그런 여배우가 없었거든. 98년 봄인가,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 쫑파티(종방연) 때였을 거야. 밥 먹으면서 내가 진실이한테 그랬어. "넌 TV 속에서 한국의 여인상, 어머니상을 꼭 구현해 달라"고. 깜짝 놀라더구만. 하긴 그때는 시집도 안 간 처녀였으니까. 언젠가 세월 지나면 내 말 뜻을 알게 될 날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 얘긴 그만 하지.
난 여배우에 대해선 해줄 얘기가 거의 없어. 알잖아. 어려서부터 늙은이 역할만 해왔는데. 여배우랑 멜로 라인으로 얽힐 일이 있어야지. 아쉽지 않았냐고? 다 지난 세월이지만… 연극을 보든지, 영화를 보든지 그런 생각은 수시로 있었지. 저런 여인하고 같이 연기를 해봤으면 좋겠다, 하고. 근데 그렇게 마음 먹으면 하게 되더라고. 그 사람 아버지 아니면 시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역할로 말야. 허허.
그래도 김혜자씨 얘기를 안 할 수 없겠지. 20년 넘게 TV에서 부부로 살았으니까. "낮엔 김혜자랑 살고 밤에는 김민자(부인)랑 사느냐"는 시답잖은 농담도, 자꾸 들으니까 왠지 진짜 오해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더라고. 언젠가 마누라랑 여행을 가다가 공항에서 나이 드신 어른들과 마주쳤는데 이 분들이 그러시데. "아이고, 김회장님을 여기서 만나네요. 근데 따님이신가 보죠? 보기가 아주 좋습니다." 지금도 적잖은 사람들이 김혜자랑 내가 진짜 부부 사이인 줄 알아. 대단한 인연이지.
근데 말야, 사실 김혜자라는 배우에 대해서 사람들은 잘 몰라. 내가 처음 김혜자를 봤을 때 받은 인상은 말이지, '아 이 여자 정말 그로테스크하다'는 거였어.
67년인가 68년인가 그때쯤이었을 거야. 내가 아직 국립극단에 있을 땐데, 하루는 민중극장에서 연극 연습을 하는데 객석 맨 앞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거야. 첨엔 불이 난 줄 알고 가봤더니 조그마한 여자가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거야. 콧날도 오똑하고 상당히 이국적인 마스크인데다 분위기가 굉장히 묘했지. 멜랑콜리하달까. 하여튼 나도 배우인데 기죽은 꼴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건들건들한 말투로 얘기했지. "여기서 담배 태우면 안 되잖아? 끄셔야지."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아, 잊어버렸네요." 그러면서 비벼 끄더라고. 그게 김혜자와의 첫 만남이야.
나중에 들었는데 이화여대에서 그림 공부하다가 그만두고 성우 하는 여자라더군. 근데 그게 재미없어서 연극을 막 시작하려던 때였지. 예술가적인 분위기를 확 끼치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 첫 느낌이 '이 여자 물건 되겠다' 하는 것이었으니까. 근데 알고 보니 사람은 맹탕이야. 사회 경험도 거의 없고, 사람 사이의 관계니 이런 것도 아는 게 없고… 굉장히 순수한 사람이었어. 밖으로 풍기는 이미지하곤 달랐지. 아버지가 굉장히 엄격한 분이었다고 한참 지나서 그러더군. 나하고 겨우 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거기 대면 나는 완전히 닳고 닳은 거였어.
그런데 원래 갖고 있는 연기의 에너지랄까, 배우로서의 색깔이 굉장히 진해. 정말 피를 토하듯이 내면을 표출해내는 배우니까. 그래서 안타까워. 사실 '전원일기'에 희생당한 거잖아. 김혜자라는 배우의 본 면목은 깡그리 지워지고 수더분한 촌부, 전형적인 어머니의 모습으로만 20여년 소비됐으니까. 연기로 치자면 나보다 폭이 훨씬 넓은 배우인데. 그걸 표현해본 건 아마 김수용 감독의 영화 '만추'(82)가 유일했을 거야. 얼마나 아까워? TV드라마의 한계이기도 하지. 여자 탤런트를 써먹는 방식이 너무 진부했잖아.
그래서 봉준호 감독이 대단한 것 같아. 영화 '마더'(2009)에서 김혜자의 그런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줬잖아. 수십년 감춰졌던 모습인데 젊은 감독이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봉준호란 친구 정말 똑똑한 친구인 것 같아. 김혜자가 칸국제영화제 가서 레드카펫을 밟는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뭉클하더군. 뒤늦게라도 그 배우의 가치가 발현되는 듯해서 정말 기뻐. 더 나이 들어서도 열심히 연기하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어. 요즘? 자주 못 만나. 가끔 경조사 자리에서 보거나 누가 개업했다 그러면 만나는 정도지 뭐.
다른 여배우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제값보다 낮게 쳐져서 뻔한 역할만 하다가 나이 들어버린 경우가 한둘이야? 알고 보면 대단한 연기자들인데. 같이 작품 안 해본 배우에 대해서 말하기는 그렇고… 박원숙이나 이경진만 해도 정말 괜찮은 배우들이야. 박원숙 연기를 보면 캐리커처를 보는 듯하잖아? 만화를 그리신 아버지 영향인지, 아무튼 과장돼 보일 수 있는 표현인데 그게 굉장히 자연스러워.
감정 증폭의 표현을 그만큼 잘 하는 배우가 없어. 이경진도 '그대 그리고 나' 할 때 정말 비련의 여인이 돼 버리더라고. 작품의 캐릭터에 그렇게 무섭게 몰입한 배우를 못 봤어.
뭐? 스캔들? 에이, 왜 이래. 내가 그럴 주제가 못 되잖아. 하긴 딱 한 번 스캔들이 난 적이 있지. 그게 기사였어. 60년대 말의 일이지. 내가 국립극단에 있고 마누라(김민자)가 KBS '정동마님'에 출연하고 있을 땐데, 예쁜 눈매에 지성미가 돋보이는 게 딱 내 이상형이더군. 어찌어찌 하다가 내가 KBS에 특채되고 나서 노골적으로 관심을 표시했지. 그게 주간한국 기자 눈에 띄어서 대서특필됐지. 꽤나 시끄러운 스캔들이었어. 사실 나보다 마누라가 훨씬 인기가 있던 시절이었거든. 다행히 그 기사 이후 우리는 더 가까워졌고 결혼에 골인했지. 그래서 이후로 나는 감히 스캔들을 낼 생각을 못해. 저보다 훨씬 못한 인물이랑 결혼해준 사람이 김민자씨야. 아직 그보다 더 매력적인 여인을 못 만나봤어. 정말로.
정리=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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