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에 온 공문이 하루 20건 "잡무 처리 틈틈이 수업해요"
#5월 서울시교육청에서는 웃지 못할 촌극이 빚어졌다. 교사 행정업무 감축에 대한 여론을 듣기 위해 포털사이트에 토론방을 개설했다가 "칼퇴근하고 철밥통인 교사들이 웬 엄살이냐", "학원 수업보다 못한 수업을 하며 웬 핑계냐"는 질타가 이어진 것. 당황한 시교육청은 개설 6일만에 토론방을 폐쇄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사이버 공간에 토론을 내맡겨 교사들에게 상처만 줬다"고 항변했지만 외부의 차가운 시선을 실감한 교사들은 떨떠름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이 많아 수업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교사의 호소와 '잡무는 할 수 없다는 의식부터 바꾸라'는 세간의 시선.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오해일까. 서울의 A고교를 찾아 교무실의 하루를 들여다봤다.
"이건 수업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에요. 거의 공문처리기계 수준이지"
27일 오전 8시 A고교 교무실. 3학년 담임교사 B(32)씨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나이스)에 접속해 반 학생 35명의 도로명 주소지를 일일이 입력하며 던진 말이다.
오전 7시 20분부터 학생 등굣길 정문 질서지도, 7시 40분 학급 조회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B씨 입에서 한숨부터 나왔다. 노트북을 켜니 교내업무처리 메신저가 깜박였다. 전날 학교로 수령돼 전체 교사에게 공람된 공문은 꼭 20건. '주5일 수업제 시행계획 알림''학교생활기록부 주소 도로명 전환 협조 요청'등이었다.
올 1월부터 이날까지 학교로 내려온 공문은 총 9,824건. B씨는 "밖에서 교사들은 방학마다 뭐하고 노느냐는 속 모르는 소리를 하지만, 업무를 처리하는 틈틈이 겨우 수업에 달려들어가는 형편이라 방학마다 연수, 교재연구에 정신을 못 차린다"고 억울해했다.
일선 중고교 교사 한 사람이 담당하는 업무는 크게 세 가지이다. 맡은 과목을 가르치고(교과업무), 담임교사로서 학생들의 출결, 상담, 등록금납부현황 등을 관리하며(담임업무), 수업계 성적관리계 등 지원부서에 포함돼 행정업무 일체를 처리(지원업무)한다.
B씨는 10번 학생의 주소까지도 손 대지 못한 채 부랴부랴 3교시 수업으로 향했다. B교사의 등줄기에 대고 옆자리 교사가 "국정감사 자료 안 맡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 나처럼 5년치 학교폭력통계를 당장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성적관리계 소속의 막내 교사 C(27)씨는 다음달 중간고사를 앞두고 울기 직전의 표정이다. 그는 "시험기간만 되면 시험지 편집, 나이스 프로그램에 과목별 수행평가 비율 설정하기, 답안지 전산 채점, 엑셀 프로그램에 입력해 성적우수자 산출 등 일이 산더미라 밤 11~12시 퇴근은 당연할 정도"라고 토로했다. 별도의 과 업무를 처리하며 틈틈이 이날 4시간의 수업과, 2시간의 방과후 학교 수업을 해냈다.
이처럼 업무가 과중한 이유로 교사들은 ▦교육과 무관한 수납, 결재, 입력 행정업무의 상당부분 담당 ▦소규모 테마 수학여행 등 교사 개인이 기획, 섭외, 결재해야 하는 사업 증가 ▦독서활동 등 나이스와 에듀팟 사이트에 교사가 직접 입력하는 항목 증가 ▦젊은 교사에게 고된 일이 몰리는 관행 등을 꼽았다.
수학교사 D(36)씨는 "대다수 교사들이 행정, 관리 성격의 업무를 모두 분담하면서 오히려 수업준비, 학생상담 등은 점차 외면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연초에 전 학년 수업시간표를 짜고 매일 병가, 조퇴하는 교사들을 체크해 대신 수업에 들어갈 교사를 섭외하는 수업계 담당 교사의 경우, 정작 본인 수업에는 10~20분씩 늦게 되고, 자신 학급의 학생이 학교폭력에 휘말리거나 장기무단결석을 하는 돌발상황을 맞으면 속수무책이 된다는 것. 그는 "피해는 결국 지치고 날카로워진 선생님들에게 수업을 듣고 의지해야만 하는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이날 등교지도, 1~6교시 수업, 점심식사 질서지도, 7~8교시 방과후 수업, 6~10시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마치고 교무실의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은 밤 11시께. 과학 교사 E(50)씨는 "수년 전 입시학원에서 강사를 하다 학교에 부임했던 동료교사가 '수업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학원으로 돌아갔다"며 "잘 가르치지도 못하고 학생 지도에도 소홀하다는 등 교사를 향한 비난이 날로 늘어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씁쓸해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 교사 430명 설문… 교직사회 문제점은
우리나라 교사들은 교육계 안팎에서 거론되고 있는 공교육 위기의 주범으로 '입시 위주의 교육현실'을 꼽았다.
한국일보가 전국 초중고교 교사 4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47.6%의 교사가 이렇게 답했고 이어 '창의적 교육을 할 수 없는 학교 시스템'(28.3%), '공교육에 대한 정부의 투자 부족'(12%) 등 구조적 문제를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경기의 한 고교 교사는 "고3의 경우 탐구 영역의 비선택과목은 수업을 거의 듣지 않고, 심지어 교내 정기고사에서도 거의 버리는 과목인 것이 현실인데 어떻게 공교육의 내실화를 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교사의 자질 부족'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1.9%에 불과했으나 교직사회가 고쳐야 할 점을 묻는 주관식 설문에서는 '교사들의 무사안일, 매너리즘을 고쳐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승진에 목매는 교사, 아이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교사, 연구하지 않는 교사들을 보면 의욕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경기도의 한 고교 교사는 "차세대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구세대의 교육 내용을 지도하고 있다. 교사들이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반성했다.
경기의 한 고3 담임교사는 "요즘은 소득수준이 높은 집의 모범생들이 교대, 사범대를 간다. 그래서 소위 밑바닥 아이들을 이해 못한다. 고시라 불리는 임용시험을 통과하면 겨우 지식 조금 있는 것을 가지고 완벽하다는 착각을 한다"고 노력하지 않는 교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교사를 뽑을 때 지식전달이 아닌 교육철학을 갖춘 사람을 뽑도록 교원양성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덧붙였다.
교사들의 자기반성과 함께 교권 추락으로 인한 자괴감도 두드러졌다. 응답자의 61%는 학생과 학부모의 언어폭력이 심각하다고 응답했고, 최근 1년동안 언어 및 신체적 폭력을 실제 경험한 경우도 2~5회(21.8%), 1회(12.4%), 5~10회(3.2%)로 10명 중 3명이나 됐다.
경기의 초등학교 6학년 교사는 "수업 중인데도 학부모가 불쑥 교실로 들어와 아이를 내보내 달라고 학생들 앞에서 반말로 요구한 경우가 있었다. 아이가 불이익을 당했다며 술에 취한 학부모로부터 근거없는 항의전화를 받은 적이 수 차례"라고 말했다.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학교 문화도 교사들을 위축시키는 것으로 조사됐다. 학교에서의 의사 결정은 '교장, 교감의 독자적 판단으로 결정된다'는 응답이 36.6%였던 반면 '교무회의에서 다수결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는 응답은 3.6%에 불과했다.
지방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교실 사물함 위치를 바꾸려다 학생들 보는 앞에서 교장 선생님에게 학생처럼 혼났다. 결국 1년을 그대로 살았다"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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