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기침체 우려가 확산되면서,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현재 시나리오 경영체제에 돌입한 상태다.
한 대기업 임원은 "경기방향이 확실하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호전될지 더 악화할 지 좀처럼 판단이 힘들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럽재정위기나 미국 더블딥 모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는 만큼, 대기업들은 '플랜A' '플랜B' ' 플랜C' 등 시나리오별 대응체계를 만들고 있다.
삼성은 내년을 3%대의 저성장 국면으로 전제하고, 경영계획을 수립 중이다. 삼성 관계자는 "올해보다 경제여건이 악화되는 건 분명해 보인다"며 "아무리 어려워도 투자할 것은 투자하겠지만 큰 틀에선 긴축모드로 간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예민한 건 환율. 그룹 싱크탱크격인 삼성경제연구소는 내년 평균 원ㆍ달러환율이 올해 평균(1,093원)보다 더 내려가, 1,060원 전후의 원화강세 국면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는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연간 이익이 3,000억원 늘어난다"고 말했는데, 만약 예상대로 내년 환율이 30원 이상 내려간다면 환율만으로 1조원 정도의 수익악화요인이 발생하는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통상적 위기 때와는 달리 좀 더 공격적인 모드로 바뀌었다. 2008년 리먼사태를 계기로 현대차의 글로벌 위상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던 기억이 생생한 만큼, 이번 위기도 잘만 돌파하면 추가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게 정몽구 회장의 생각이다. 정 회장은 특히 위기의 진원지인 유럽과 미국시장공략을 보다 강하게 주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내부 분위기는 확실히 비상태세다. 그룹 관계자는 "예전에 일일 보고 체계로 이뤄졌다면 지금은 시간과 분, 단위로 보고를 할 만큼 보고 시스템이 바뀌었다"고 전했다.
LG그룹은 투자계획 등을 이미 재조정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의 경우 중국 광저우에 건설하려고 했던 1조원 규모의 8세대 LCD 생산공장 착공을 연기한 상태. 휴대폰 사업 적자로 고전 중인 LG전자는 올해부터 복리후생비를 포함해 소모품비와 출장비, 교통비 등 직원들에게 지급되는 비용을 약 30% 가량 줄였다.
포스코 역시 시나리오 경영체제로 전환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경제상황을 '최선''보통' '최악' 등 3가지로 나눠 원료 투입에서부터 생산과 물류, 판매 등 전 제조 공정에 적용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정준양 회장도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경영을 강화해야 할 것 같다"고 강조했다. 다만 포스코는 다른 수출중심의 국내 대기업과는 달리 철광석 수입수요가 많은 특성상 환율이 떨어질수록 유리한데, 내년 원화강세가 예상되는 게 위안거리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일방적인 축소경영, 긴축경영은 자제하고 있다는 점. 1998년 외환위기, 2008년 리먼사태 등을 통해 학습효과가 생기면서, 기업들도 '위기=위축'의 공식에서 벗어나 오히려 확장 및 시장재편의 기회로 삼고 투자나 마케팅을 강화하는 '역발상'경영도 눈에 띄고 있다. 신창목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외부환경변화에 따라 적시에 사업의 진퇴가 가능하도록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이럴 때 상대적으로 고성장이 예상되는 신흥시장을 지속적으로 공략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허재경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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