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낮 12시20분(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400㎞ 떨어진 부르고뉴 지방의 작은 마을 테제에 자리한 범 기독교 공동체인 테제 공동체. 낮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세계 각지에서 온 500여명이 공동체 안 '화해의 교회'로 모여들어 마룻바닥에 차례로 앉았다. 대부분이 10, 20대 젊은이였다.
"주님 일어나소서. 나의 하느님 구하여 주소서…." 선창자 역할을 맡은 수사(修士)들이 낭랑한 목소리로 시작찬송을 하자 참석자들이 이를 받아 "알렐루야"를 응송(應頌)했다. 이어진 '침묵의 시간'. 손을 모으고 묵도하는 백발의 할머니와 중년 남성, 두 손을 마주 잡은 젊은 남녀…. 교회 안은 일순간 깊은 고요의 바다가 됐다.
영원처럼 느껴진 6분 가량의 침묵은 알로이스(57) 원장수사의 기도로 이어졌다. "자비의 하나님, 당신의 눈에는 모든 인생이 귀하고 소중합니다. 이 진리에 따라 살고, 이 사랑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도와주소서." 기도는 프랑스어와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한국어 등 5개 국어로 낭독됐다. 이어 찬양을 끝으로 1시간 여의 낮 기도가 마무리됐다.
이날 기도에 한국어가 추가된 것은 회색 장삼에 갈색 가사(袈裟) 차림의 자승 총무원장, 보선 종회의장 등 대한불교 조계종 스님 16명이 참관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스님들이 테제 공동체를 대거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테제 공동체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스위스 출신 로제(1915~2005) 수사가 만든 기독교 남자 수도회에서 출발했다. 화해와 용서를 실천하는 공동체를 꿈꿨던 로제 수사는 당시 나치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온 유대인들을 따뜻이 맞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독일군 포로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 테제 공동체는 개신교와 가톨릭, 정교회 등 다양한 기독교 교파의 수사들과 일반인이 함께 생활하는 범 기독교 공동체로 발전했다. 현재 전세계 30여개국 출신 수사 100여명이 머물고 있는데, 기부나 헌금은 일절 받지 않고 도자기 제조 등 직접 노동해 번 돈으로 공동체를 운영한다. 매주 수 천명, 연 10만여명의 젊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노동하고 기도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 방문객도 한 해 500여명이나 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테제 공동체로 몰리는 까닭을 테제 공동체 연구가인 제이슨 산토스씨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뿌리깊은 종파간 갈등 속에서 자란 젊은이들에게 평화를 향한 깊은 갈망을 현실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테제 공동체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모든 기독교 종파와 더불어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테제 공동체를 찾은 이들은 하루 세 차례의 기도와 그룹별 모임, 1시간여의 노동을 하고 오후 8시 반 저녁기도 이후에는 '대(大) 침묵'을 지킨다. 창설자 로제 수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해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입술을 닫고 영혼을 열면, 우리의 심장이 하느님께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침묵은 테제 기도의 심장인 셈이다.
공동체에는 1,800명이 묵을 수 있는 숙소가 있고, 방문자가 많으면 야외에 천막을 쳐 임시숙소로 쓴다. 공동체에서 1주일간 생활하려면 35~50유로(4만7,800~7만8,000원)만 내면 된다. 유일한 한국인 수사인 신한열(49)씨는 "파리 유스호스텔에서 하룻밤 묵는 돈으로 1주일간 지내며 기도하고 침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며, 기독교 교파를 초월하고 신자가 아닌 사람도 한 울타리에서 공동생활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알로이스 원장수사는 조계종 대표단과의 오찬에서 "공동체를 찾는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삶이 아주 다양하지만, 그들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이다"고 말했다.
이에 자승 스님은 "테제 공동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조계종단보다 10배는 큰 것 같다"며 "특히 검소하고 소박한 분위기에 놀랐고, 수사님들의 눈빛이 천진난만하고 너무 맑아 부처님의 아름다운 상호(얼굴) 같았다"고 말했다.
이어 "조계종단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깨달음이며, 오늘 테제 공동체를 찾은 것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면서 "공동체 프로그램을 템플스테이에 접목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테제(프랑스)=글ㆍ사진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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