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이에요 12년. 인생은 한 번인데, 12년 후면 난 마흔 셋이 된다고요!"
러시아의 잡지 편집자 예브게니야 로바체바(31)는 넌더리를 냈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내년 대선에 출마해 12년간 더 대통령직을 수행할 것이란 소식을 접한 뒤, 더 이상 러시아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내년 3월 대선 결과를 볼 것도 없이 사실상 확정된 푸틴의 장기집권은 러시아의 자유화를 바라며 그의 12년(총리 4년 포함) 권위주의 통치를 버텼던 러시아 중산층들의 마지막 기대를 무너뜨렸다.
1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많은 러시아인들이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인 모국에 대한 충성 포기 선언을 하고 있다"며 러시아를 떠나려고 계획하는 지식인들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탈출을 꿈꾸는 이들이 자주 접속하는 '이젠 사라져 줄 시간'이라는 웹사이트가 성행할 정도. 일부 전문가들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많은 러시아인들이 나라 밖으로 이민을 떠난 것과 맞먹는 집단 탈출이 조만간 시작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러시아 중산층과 지식인이 희망을 버린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90년대 초반 구소련 붕괴 이후 자유와 번영의 시기가 올 것이라 생각했던 기대와 달리, 푸틴 집권기(2000년 이후)에 이르러 정치 환경이 갈수록 과거 '철의 장막' 시절처럼 폐쇄적으로 후퇴했다는 것. 언론 자유는 통제됐고 고위관료나 재벌(올리가르흐) 자녀가 아니면 출세도 요원할 만큼 사회가 불투명하다.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센터의 레프 구드코프는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러시아 사회를 지배한다"며 "전망은 불확실하고 사람들의 분노는 커지며 사회가 정체될 것이라는 인식도 퍼져 나간다"고 진단했다.
정치에 실망한 중산층이 선택한 대안은 이민이다. 한 예측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이민 등으로 조국을 등지는 사람들은 연 5만명인데 푸틴 재집권 이후 이 숫자는 1만~1만5,000명 더 증가할 전망이다. 내년에 아내와 함께 캐나다로 떠나는 개인사업가 스테판 치초프(29)는 "나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정치체제에서 살고 싶다"며 "앞으로 20년 동안 러시아에서는 법과 제도에 의한 통치가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나마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외국으로 떠나지만 경제상황이 받쳐 주지 못해 남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아예 정권과 담을 쌓고 사는 국내 이민을 선택할 것이라고 NYT는 덧붙였다. 국내 이민이란 TV에 관심을 끊고 정치를 의도적으로 멀리하며 개인적인 영역으로 침잠하는 식으로 체제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말한다.
중산층과 지식인의 이탈은 러시아 국가 경쟁력에도 분명 좋지 않은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과학자나 연구 인력이 이탈하면 국가 연구개발(R&D) 능력이 쇠퇴할 것이 뻔하고 투명하지 못한 정치를 피해 자본이 러시아 밖으로 이탈하는 것도 러시아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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