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보다 빠른 게 있을까.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전 세계 물리학자들은 '없다'고 확신했다. 1905년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다'는 가정에 근거해 특수상대성이론을 내놓은 지 100년이 지나도록 그의 이론에 허점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물리학의 틀을 만든 이 이론은 완벽해 의문을 품는 게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 시간으로 23일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유럽입자물리소(CERN)는 '중성미자(뉴트리노)가 빛보다 빠르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중성미자는 우주를 이루는 기본 입자로, 질량을 가진 입자 중 가장 가볍다.
별 폭발해도 있는 걸로 보여
중성미자는 CERN의 가속기에서 732㎞ 떨어진 이탈리아 검출기까지 도달하는 데 평균 0.00243초가 걸렸다. 이 입자가 빛보다 0.00000006초 빠른 것으로 나타나자 물리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현대 물리학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김수봉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이번 실험이 사실이라면 상대성이론으로 설명하는 모든 현상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새로운 이론이 정립되기 전까지 어떤 일을 겪게 될까. 먼저 별의 폭발을 관찰할 때 이상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별이 폭발하면 빛과 여러 입자가 나온다. 이 때 지구에 빛이 도달한 시점으로 별이 언제 폭발했는지 확인한다. 폭발할 때 나온 빛이 지구까지 오는 데 100년 걸렸다면 그 별은 100년 전에 폭발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빛보다 먼저 중성미자가 지구에 도착했다면? 가령 지구까지 오는 데 중성미자는 99년, 빛이 100년 걸렸다고 치자. 별의 폭발을 측정하는 기기는 늘어난 중성미자 수를 보고 별이 폭발했다고 알려줄 거다. 하지만 별이 폭발할 때 낸 강한 빛은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1년 전에 없어진 별이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용균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현재 이론으로는 원인(별의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결과(중성미자의 증가)가 먼저 관측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는 셈"이라고 했다.
중성미자 에너지 무한대로
더 황당한 일은 중성미자가 질량을 가진 입자 중 가장 가벼운데도 불구하고, 이 입자 한 개가 지구와 충돌하면 지구가 부서지는 걸로 계산된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유명한 방정식 E=mc²을 도출했다. E는 에너지, m은 질량, c는 빛의 속도다. 원래 이 방정식 앞에는 '감마(γ)'라는 변수가 붙어있다. 물체가 정지해 있을 때 감마값은 1. 이 때 물체의 에너지는 여전히 E=mc²으로 계산한다.
그러나 물체가 움직이면 감마값이 작용한다. 물체의 속도가 광속에 가까워질수록 감마값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에선 무한대가 된다. 중성미자가 빛보다 빠르다면 감마값이 무한대가 되기 때문에 이 입자의 에너지도 무한대가 되는 것이다.
김용균 교수는 "중성미자는 흔히 '유령입자'라고 부르지만 외부와 미세하게 반응한다"며 "반응성이 약해도 에너지량이 무한대인 중성미자가 지구나 태양과 부딪히면 엄청난 에너지로 인해 이들이 산산조각 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실험 결과가 사실로 확인돼도 물리학의 이론 체계가 바뀌는 것이지, 일상에서 많은 것이 바뀌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범기 한국교원대 물리교육과 교수는 "CERN의 계산 결과가 확실하다면 내년부터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수정이 가해지는 것 말고는 우리 생활에 미칠 영향은 특별한 게 없다"고 말했다.
수정ㆍ보완은 몰라도 틀렸다는 건 글쎄…
물리학자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19세기까지 완벽하다고 여겨졌던 뉴튼의 역학이론이 질량이 아주 작은 소립자 세계에서 어긋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수정된 것처럼, 상대성이론도 바뀔 것인지 주시하고 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김성현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는 "CERN과 유사한 미국 페르미 연구소에서 실험을 다시 해볼 계획"이라며 "올해 초부터 수개월 동안 검증을 한 만큼 지금 얻은 결과가 틀리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홍승우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는 "상대성이론이 수정ㆍ보완될 부분은 있을지 몰라도 아예 틀렸다고 말하는 건 조급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CERN에게 지원하는 연구비가 끊길 조짐이 보이자, CERN이 연구비를 타기 위해 정식 논문도 아닌 논문 초고 등록 사이트(ArXiv.org)에 성급히 발표한 거 아니냐는 음모론도 나온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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