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손자가 없다/김경욱 지음/창비 발행ㆍ 300쪽ㆍ1만1,000원
"제목이 '없다'로 끝나면 부정적인 느낌이 강해서 책이 팔리겠어?"('연애의 여왕' 중)
대중 연애소설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대박을 터뜨려 '연애의 여왕'이란 불리는 소설 속 여성작가가 화자인 '나'에게 차기작의 제목을 묻다가 던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 단편이 실린 소설집의 제목은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다. 작가는 20년 가까이 10권의 작품집을 내며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김경욱(40)씨. 문학의 트랙에서 간단없는 자기갱신을 거듭하며 달려온 그가 피니시라인을 잊지 않은 문학의 런닝맨임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제목이랄까. 신에게는>
단정하면서도 유려한 문장과 정교한 플롯을 통해 현대사회와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던 그가 신작 소설집에서 그 문제의식의 화살촉을 더욱 벼린다.
표제작인 '신에게 손자가 없다'는 최근 '도가니 열풍'으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학교 성폭행 문제'를 다뤄 주목되는 단편이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후유증으로 말을 잃은 초등학교 손녀를 둔 노인이 '죄는 있지만 벌이 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사적인 복수에 나선다는 내용. 재개발지역에 사는 노인은 가스가 끊기고 전기와 수도마저 끊어질 상황이지만 가해자 부모들이 건넨 보상금과 "원수를 사랑하라"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는 교장의 만류 등을 뿌리치고 부유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가해자 아이들의 집을 찾아가 차량을 부수는 등 복수를 감행한다. 소설의 포인트는 후반부의 반전이다. 신의 이름으로 치밀한 복수의 계획을 세워 심판을 단행하지만 그 결과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아무도 노인의 복수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무심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며 막이 내린다.
비장한 복수극마저 무(無)로 삼켜 버리는 완강한 현실은 이중 삼중의 해자를 설치한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탈출구 없는 미로다. 소설집 전반은 이 현실 앞에서 원인과 결과, 진실과 환상을 구별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삶에 처한 인간들의 황량한 내면과 불안감, 서로에 대한 적대 등을 흥미롭게 그린다.
'런닝맨'은 가난한 과외교사인 주인공이 강남에 사는 과외 제자 여고생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한가롭게 나들이를 하던 이 커플은 뱀 문신을 한 사내와 맹목적인 경주를 벌이고 오토바이 폭주족과 마주치며 막연한 불안과 긴장감에 휩싸인다. 구체적인 위협이 없지만 상대를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 묘사가 범죄 스릴러 소설을 방불케 한다. 소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강남 아파트 단지를 선망하는 주인공 역시도 그들에겐 잠재적 범죄자로 비친다는 점을 드러내며 성밖의 인간들 모두가 적대적 시선에 포박돼 있음을 일깨운다.
이외 1%의 상류층을 향한 속물적 욕망을 되비추는 '99%', 두 남녀의 불가사의한 죽음을 다룬 '하인리히의 심장', 출구 없는 가난에 짓눌린 남자들 삼대의 생활을 담담하게 묘사한 '태양이 뜨지 않는 나라' 등 모두 9편의 단편이 담겼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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