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에 6.25전쟁 때 행방불명 된 형님의 사망신고를 했어요. 딱 61년만이네요."
박치국씨(64)씨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형의 이름이 적힌 사망자 명부를 내놓는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박씨의 친형인 치선씨는 당시 18세 되던 해인 1950년 12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됐다. 9.28 서울 수복 직후였다. 혐의는 북한군에 대한 부역. 하지만 박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시민들은 그저 살기 위해 그들의 말에 따랐을 뿐"이라면서 "형님도 북한군에 끌려갔지만, 일주일 만에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형이 어느 날 소리소문 없이 행방불명 된 것이다. 형무소 관계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자료가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가족들이 애간장을 태우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한 달 후인 1951년 1월 중순 형과 대전형무소에서 같은 방을 썼다는 사람이 찾아왔다. 형이 소식을 보내온 것이다. 하지만 부리나케 찾아간 대전형무소에서 들은 대답은 "그런 죄수는 없다"뿐이었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사람들은 부산으로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1.4후퇴로 인해 대전형무소에 있던 죄수들도 부산으로 다 이송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3남 1녀 중 장남이었던 형을 찾기 위해 연탄 회사를 다니던 아버지는 아예 일을 그만두고 전국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때 단란했던 가정은 이후 삶의 바닥으로 추락해 갔다. 박씨는 "59년 1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쯤 가세는 기울 데로 기울어 서울 답십리의 경미 극장 앞에서 움막을 치고 살았다"며 "형이 꼭 살아서 돌아온다는 믿음에 강제 철거를 당할 때까지 부모님은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로부터 3년 뒤 박씨의 어머니도 형을 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형을 꼭 찾으라"는 유언만이 어린 박씨의 귀에 맴돌았다. 박씨는 이후 틈만 나면 전화번호부를 뒤적였다. '박치선'이란 이름을 모조리 찾아 전화를 거는 게 일이었다. 82년에는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에도 나갔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즈음 2005년 1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생겼다. "얼마나 좋은 이름이냐"며 웃음을 지은 박씨는 "형님을 찾을 마지막 기회였다"고 말했다. 다음해 5월 '대전형무소에서 행망불명 된 형을 찾아달라'는 민원을 제출했다. 지난해 9월 진실화해위가 발표한 '대전ㆍ충청 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조사결과 보고서에서 형의 실종에 관한 비밀이 풀렸다. 사망 일시는 1951년 1.4후퇴 당일인 1월 4일. 사망원인은'고문사'였다.
하지만 박씨의 실종자 찾기는 끝나지 않았다. 형의 최종 행적을 찾는 과정에 형과 같은 날 사망한 121명의 '대전형무소 사망자 명부'를 봤기 때문이다. 121명 중 대전 사람 2명을 제외하면 형과 같이 다 서울에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박씨는 "형이 대전형무소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형의 죽음이라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121명의 가족들은 60년 동안 헤매던 나처럼 실종된 아들ㆍ형제들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밝혀줄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12월 해체됐다. 박씨는 "정부가 형을 포함한 122명의 죽음에 대해 그 동안 유족들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며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121명의 사망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유족에게 통보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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