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치곤 절묘하다. 말기암 시한부 인생. 드라마 '여인의 향기'의 이연재와 영화 '투혼'의 오유란의 삶은 엇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억척스러운 노처녀 연재는 생의 막바지에서 꼭 해야 할 일들을 찾아나선 반면, 유란은 야구선수 남편과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마지막까지 주부로서 최선을 다한다. 전혀 다른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역할이지만 "명치 끝이 아린" 연기들이다. 쓸쓸한 정서를 동반해도 종국엔 웃음을 안겨주던 김선아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뜻하지 않게 여의도와 충무로를 오가며 두 번의 시한부 삶을 살아낸 김선아를 27일 낮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암환자 연기를 위해 잠을 안자고 밥도 많이 굶었다. 먹는 장면 나올까 봐 촬영 기간 TV도 안 봤다"는 그의 얼굴은 수척했다. 그는 "이건 말해도 되지 않겠어요?"라며 질문마다 허심탄회하게, 그리고 길게 답했다.
'투혼'의 오유란은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에서 2군으로 전락하고 바람까지 피우는 구제불능 남편 윤도훈(김주혁)때문에 속을 끓이는 인물이다. 연출은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등 코미디영화로 이름을 떨친 김상진 감독. 대중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캐스팅에 예상 밖의 조합이다. 김선아도 "시나리오 보고선 감독님과 너무 안 어울려 '왜 이런 걸?'이라고 생각했고, 감독님에게 '에이 말도 안돼'라고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시나리오대로 영화가 나와준다면 별 문제 없겠다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감독님이 열 번째 영화라 각오가 남다르시더라고요. 감독 이전에 가장이기도 하고요. 감독님이 지금까지 버텨온 힘은 언니(김 감독 부인)의 내조가 아닐까 싶어요. 감독님 아마 언니 안 만났으면 쫓겨날 정도가 아니라 큰일 났죠. 큰일. 어떻게 맨날 술을 마시냐고요."
성격이 "개차반인" 유명 프로야구 선수 남편을 위해 그림자처럼, 숨 죽이고 살아야 하는 역할을 하고 나니 그는 "'결혼하지마, 그냥 혼자 살아'라는 주변의 말들을 실감하게 됐다"고 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결혼은 좀 생각을 해보고 할 짓이다'라는 생각이 딱 들었어요." 김주혁이 진저리 쳐지도록 연기를 잘해서일까. 김선아는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가장 많이 주입한 건 김 감독님"이라며 웃었다.
"남자 주인공 윤도훈이 자기라고,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들 모습이라고 하더군요. 남편이 유명 프로야구 선수라 유란의 결혼생활이 더 힘든 것 같아요. 제 남편 될 사람이 일반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저희 엄마도 저 때문에 쓰레기 버리러 나갈 때 옷 다 차려 입고 나가거든요."
그는 여전히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2005년 이전의 저를 잊은 듯하다"고 했다. "TV에서 영화 '잠복근무'나 '위대한 유산', 'S 다이어리' 등이 방송될 때마다 아는 사람들에게서 '저런 때가 있었구나' 식의 문자가 온다"고 말했다. 그는 "정통 코미디는 '위대한 유산' 딱 하나 했다. 진지한 연기를 해도 포장은 코미디인 드라마가 많아 손해도 보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삼순이 때문에 대중들이 당당한 싱글 여성으로 보는 것 같다"는 말에 "(젊어 보이면) 나야 좋죠 뭐"라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여인의 향기'와 '투혼'은 그의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 될듯하다. "지금까지 안 해본 역할이어서 배우면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어요. '투혼' 촬영 중 '여인의 향기' 섭외가 들어왔는데 '또 시한부야?' 하면서도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해야 할 일 목록) 이야기 듣고 마음이 움직였어요. 아픈 역할을 두 번이나 한 올해는 제가 큰 모험을 한 해에요. 그 모험이 무난하게 이뤄진 같아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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