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인사로 중용된 사람이 은인인 인사권자에게 대드는 장면은 국제무대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12세기 영국의 헨리 2세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낙점한 토머스 베켓이 왕의 뜻을 거슬러 교회 편에 섰고, 보수주의자인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 해리 블랙먼이 낙태허용 등 진보적 판결을 주도한 게 그런 예다.
지금 독일에서는 옌스 바이트만(43) 분데스방크(중앙은행) 총재가 그렇다. 5월까지 총리실 보좌관이었던 그는 경기침체의 해법을 놓고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 반기를 들며 '주군'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바이트만은 메르켈 총리가 주도하는 유럽재정안정기금(EFSF) 증액안을 "위험하고 원칙에 맞지 않는다"며 노골적으로 반대한다. 연방의회 의원과 유로존 재무장관들을 만난 자리에선 "구제금융 계획을 다시 짜야 한다"는 파격 발언을 서슴지 않는 등 다른 중앙은행 총재들의 '신중한 언행'과는 대조적이다.
시사주간 슈피겔은 "5년간 메르켈에 충성을 다했고, 심하게 가깝다는 평가를 받던 바이트만이 메르켈의 유로존 구제금융에 가장 강력한 반대자가 됐다"고 26일 보도했다.
그가 불과 4개월 만에, 자신을 사상 최연소 중앙은행 총재로 밀어준 메르켈 총리에 대놓고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파이낸셜 타임스는 철저한 독립성과 엄격한 통화정책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온 분데스방크의 전통을 이유로 들었다. 총리 보좌관은 정권의 경제적 치적을 고려해야 하지만, 중앙은행 총재는 보수적 통화정책을 펴 안정적 경제환경을 조성하는 게 책무라고 판단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독일은 1920년대 수천%에 달하는 살인적 인플레를 경험했고, 이 때문에 나치 독일이 출현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어 보수적 재정ㆍ통화정책은 독일 금융당국자들에게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신념이다.
하지만 바이트만에게도 고민은 있다. 구제금융을 저지하면 중앙은행 총재의 책무는 다하겠지만 독일이 최대 지분을 쥔 유럽중앙은행(ECB)은 위기를 맞는다. '저항'이 실패할 경우 총리의 신임도 상실하고 시장의 신뢰도 잃을 수 있다.
토마스 마이어 도이체방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그의 성공을 바라지만, 실패하는 쪽에 베팅하겠다"며 바이트만이 이 싸움에서 메르켈 총리를 이길 가능성을 낮게 봤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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